- < 발랄한 여인의 초상화 > # 2
신고전주의 미학을 따라 충실하고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담 레카미에의 초상(Portrait of Madame Récamier)> 작업. 다비드는 작품 배경과 세부적인 인물 묘사 등의 최종적인 정리를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의뢰자이자 모델인 젊은 레카미에는 화가의 느린 작업 속도를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를 마뜩잖게 바라보았다.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 안에서 우아한 고전적 여인상으로 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본 그녀는 오히려 다비드의 작품을 고리타분하게 여겼다.
레카미에는 자신의 젊음과 매력을 절제해 표현하기보다는 밝고 경쾌하게 발산하고 싶어 했다. 다비드의 화풍과 붓질에 한계를 느낀 레카미에는 화가의 이젤 앞에 모델로 서기가 점점 싫어졌을 것이다.
다비드와의 관계는 불편해졌고 결국 초상화 작업은 완성을 앞두고 멈췄다. 약 2년 후, 다비드를 뒤로하고 그녀가 새로 만난 화가는 30대 초반의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였다. 그는 신화화(神話畫)와 역사화 그리고 많은 초상화를 그렸던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였다.
피르민 마소트(Firmin Massot)의 유화 <마담 레카미에의 초상화(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를 보자. 서른 살 무렵, 샬롱의 여왕 레카미에가 짧은 머리에 어깨가 드러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프랑스 화가 앙투안-장 그로스가 그린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의 초상화>를 보자. 다비드의 수제자, 프랑수아 제라르의 20대 초반 모습이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제라르는 궁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서 나폴레옹 황제와 그의 아내 조세핀(Josephine)의 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제라르의 화실 작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와 <황후 조세핀의 초상화>를 감상해 보자.
그는 <큐피드와 프시케(Cupid and Psyche)>를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로마 그리스 신화에서 프시케(Psyche)가 쿠피도(Cupido)로부터 첫 키스를 받는 장면이 담긴 제라르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제라르의 <줄리엣 레카미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와 <줄리엣 레카미에의 초상>을 감상해 보자.
레카미에 초상화 작업은 다비드가 1800년 5월에 먼저 시작했지만, 완성은 1802년 제라드가 먼저 했다.
다비드의 중단된 초상화 <마담 레카미에>와 제라르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de Juliette Récamier)>은 구도와 몇 곳의 도상이 유사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선 그녀의 시선과 앉아있는 자세를 보자. 마담 레카미에가 의자 스타일의 소파에 가볍게 기대듯 앉아있다. 얼굴이나 상체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어 감상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희고 긴 드레스 자락을 소파나 의자 아래로 늘어뜨린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양쪽 발 모두 벗은 상태에서 드레스 자락 밑으로 발등까지만 드러내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가 비슷한 시기에 동일 인물을 소파나 의자 위에 놓고 그린 두 작품은 닮은 듯싶으면서도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선, 수평 화면과 수직 화면 등 프레임(Frame)이 주는 분위기 탓일 것이다.
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에>를 보자. 수평 프레임에 담긴 다비드의 레카미에 초상화는 기대어 누워있는 모델의 자세처럼 편안하고 안정적 분위기다. 반면, 수직 프레임에 그려진 제라르의 초상화는 앉아있는 주인공이 금방이라도 소파에서 일어설 듯 운동감이 돈다.
더불어 수직 구도는 하이웨이스트 드레스(high-waist dress)의 엠파이어 실루엣(Empire silhouette)을 한껏 들어내면서 그녀의 관능미를 돋보이게 한다.
다음으로는 화면의 배경 차이이다. 다비드의 배경은 단순하고 인물 주변 소품은 단출하다. 물론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라르의 화면을 보면 커튼이 처진 아치형 문 사이로 바깥 풍경이 묘사되어 있어 배경이 다채롭다. 우측에 배치된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은 화면에 깊이감을 주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마담 레카미에를 신성하고 우아한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여신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제자 제라르는 스승과는 달랐다. 프랑수와 제라르는 의뢰자의 주문과 기대대로 그녀를 더 어리고 생동감 있게 창조했다.
결국 제라르와 다비드가 각각 묘사한 레카미에는 정말 동일 인물인가 싶을 만큼 달랐다. 제라르는 회화를 통해 레카미에가 원하던 레카미에를 탄생시켰다.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사교계 명사 중 한 여인이었던 마담 레카미에는 프랑수아 제라르를 만났을 때 초상화를 의뢰하면서 한 가지 주문을 덧붙였다.
"나를 좀 더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그려 주세요."
레카미에가 했던 주문은 세상 모든 여성들의 기대와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제라르는 그녀의 요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2년 전 작업이 중단된 스승의 미완성 초상화 <마담 레카미에>를 떠올렸다. 그리고 스승 다비드가 그린 부스스하고 고풍스러운 레카미에의 머리를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로 바꾸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헤어 컬러와 디자인을 연구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때 첫 번째 부인, 황후 조세핀(Empress Josephine)이 차려입고 등장해 유럽 전역을 물들게 했던 '엠파이어 스타일(Empire style)'.
당대의 패션리더인 조세핀이 엠파이어 스타일을 즐겨 입자, 프랑스 여성들 사이에서도 불이 번지듯 크게 유행했다.
제라드와 레카미가 황후 조세핀의 패션 스타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 <줄리엣 레카미에의 초상>를 보면 그녀의 머리는 '엠파이어 헤어스타일(Empire hairstyle)'을 하고 있다.
이 헤어 스타일은 나폴레옹 제국 시대(Napoleon's Empire)에 고대 그리스 헤어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다. 이마 가운데에서 머리카락을 가르고 부드럽게 뒤로 당겨졌다. 보통 리본, 머리띠 등 가벼운 액세서리로 마무리 장식하는 것이 이 양식의 특징이다.
4년 전,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초상화를 완성했던 제라르는 그때의 작품 구도를 떠올리며 마담 레카미에를 야외 풍경과 우측에 기둥이 보이는 고급 소파에 앉혔다. 앉아있는 방향이 황후 조세핀과는 좌우가 바뀐 구도이지만 레카미에의 포즈는 매우 우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제라르의 1801년 작품 <말메종의 황후 조세핀(Kaiserin Josephine in Malmaison)>을 감상해 보자. 우아한 흰색 엠파이어 스타일 드레스를 착용한 황후 조세핀이 산책 후 긴 소파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황후의 고상한 자세는 작품 배경으로 그려진 말메종 성(Château de Malmaison) 주변의 전원 풍경과 연결되고 있다. 말메종 성은 고혹한 장미꽃 향과 조세핀과 나폴레옹의 사랑이 가득 담긴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제라르는 스승 다비드가 레카미에에게 두른 어두운 머리띠를 벗겨냈다. 그리고 그녀의 블론디 헤어를 블랙에 가까운 컬러를 사용해 진한 머리카락으로 바꾸었다.
레카미에는 머리카락을 그리스풍으로 모아 올린 후, 옆머리를 늘어뜨린 올림머리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헤어밴드나 리본 등 독특한 액세서리로 장식하는 당시 양식을 따라, 큐피드 화살 느낌의 핀으로 머리를 마무리했다.
그녀의 의상은 고대 그리스 풍의 흰색 슈미즈 가운(chmise gown)이다. 당시 파리의 귀부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코르셋이나 속옷을 착용하지 않은 체 란제리(lingerie)처럼 슈미즈 가운을 입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바디라인이 하얀 가운을 타고 봄 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제라르의 초상화 완성작을 본 그녀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