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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01. 2020

나의 시작에게 - 2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고, 처음으로 미워한 사람






누구에게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싶지 않아서 덮어 놓은 감정이나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덮어 두고 잘 살아왔지만 어느 날 어떤 계기로 그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 전의 감정으로는 돌아가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무시하고 있으면 서운한 마음들은 곧 잊힐 것이고 굳이 엄마에게 이제 와서 하고 싶은 말도 알 수 없었다. 동생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갔고 나도 원래 살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친척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요새 취업도 잘 안 된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바로 직장을 구했는지 정말 대단하다고 하면서 면접 봤던 곳 중 한 곳에서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고 당분간 같이 지내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런데 A가 아직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니 바로 혼자 자취하게 걱정된다고 1달 정도 같이 지내다가 집을 구해주던지 같이 사는 건 어떠냐고 했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즐거운 상상의 나래 속에 빠져 있는 듯 그의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됐다. 원룸에서 둘이 사는 것은 좀 그러니 방이 두 개인 집을 구하자는 둥 지금 집이 열쇠 잠금이라고 하니 요새 누가 열쇠 쓰냐고 번호키를 당장 달아주겠다는 둥 약간의 걱정과 큰 설렘으로 내 의견은 이미 들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정신없이 전화를 끊고 보니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내 공간에 대해 혼자 마음대로 결정을 내려버린 그에게 화가 났다가 이런 얘기를 왜 당사자인 A가 직접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단지 전화 한 통과 이런 이유만으로 화가 났다 하기엔 내 기분은 너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내 나름대로 누군가와 떠들면 조금 괜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척의 얘기를 전하고 멋대로 얘기한 것에 화가 났다고 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둘이서 한참 흥분된 말투로 화를 쏟아 내다가 1달 후에는 어쨌든 나가 달라고 얘기할 생각이라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그래도 A가 아직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으니 먼저 말을 꺼내지는 말라고. 갑자기 누가 내 목구멍을 콱 막은 것 같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냥 전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제야 내 기분이 왜 그렇게 바닥을 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A가 부러웠다. A가 극성맞은 엄마 때문에 그 긴 시간 힘들어하고 겨우 안정을 되찾아하고 싶은 일을 해 보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 왜 A를 부러워하는 걸까. 내 형편없는 마음 씀씀이에 좌절하면서도 너무 선명해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좀 전 엄마와의 통화에서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아 말할 수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사실 나도 그때 힘들었어! 나는 그 지긋지긋한 불안증을 엄마한테도 숨기고 혼자 취직하고 집 같은 집을 구하려고 아등바등했다고! 그런 말들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1년 전도 아니고 거의 10년이 다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얘기한다는 건 그것도 힘들었다고 알아달라고 징징거리기 위해 얘기를 꺼낸다는 건 서른 넘은 어른이 할 짓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또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나면 괜찮아져.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혼자 살면 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 장점들이 단점으로 변할 때가 종종 있다. 집으로 들어가면 나를 아무도 방해할 사람이 없다는 장점은 이런 순간에는 지옥으로 변해버린 내 감정 또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는 단점으로 바뀐다. 밥을 먹고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기분은 그대로였다. 하필 그즈음 몇 개월에 한 번씩 짐을 싸 이사를 다니던 대학 시절과 취준 시절을 글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감정들이 생생했는지도 모른다. 처음 그 글을 쓸 때는 사실 그때 이사를 다니면서 웃겼던 추억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점점 쓰다 보니 내가 굳이 겪을 필요가 없는 고생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던 걸까?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집을 찾으려고 했던 게 내 속에서는 잘한 일이라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내 정신이 좀 먹고 있었는데 그 사실마저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것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결책도 뚜렷하게 없는데 괜히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옆에 있어준 고마운 친구 덕분에 잘 지나왔고 이제 분명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소소한 몇 번의 대화를 거쳐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 놓고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지. 이제라도 내가 취업 준비할 때, 고시원에 살 때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려서 잠도 못 자고 힘들었다고 고생했다고 알아달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속은 부글거리고 화는 나는데 나조차도 내가 이해가 안 돼서 속이 터지다가 결국은 내가 고시원이나 옥탑 같은 곳에 살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과거의 엄마를 원망하게 되고, 거기다 이런 상황에서 내 감정을 헤아려주거나 극성맞은 A의 엄마처럼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A를 걱정하는 현재의 엄마에게도 너무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자꾸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 감정들을 다시 덮어 두려 애썼다. 지금까지 잘 지내왔는데 어떻게 새삼스레 화를 내겠냐고. 내가 말하지 않았고 내 선택이지 않았냐고. 그때 집의 사정상 어쩔 수 없지 않았냐고. 이성적으로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저 그 밤이 지나가길 바랐다. 다음 날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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