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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11. 2018

그와 그녀의 어떤 순간

찰나이면서 영원인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만나러 오는 길부터? 아니면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던 시간부터? 아니면 오늘 아침부터? 지금 엑스레이를 찍어본다면 아마 그녀의 속은 심장으로 꽉 차있을 것만 같다. 어찌나 열심히 뛰는지 가만히 둔 손이 심장박동에 쿵쿵 떨리는 것만 같다. 그 손이 떨리지 않는 척. 그게 그녀의 현재 과제다. 그를 볼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편안한 척하고 물론 그가 ‘척’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까지가 과제의 정확한 범위다.


“기타 배우고 싶긴 한데 저는 손톱을 바싹 깎으면 그 느낌이 너무 싫어요. 약간 아프기도 하고, 손 밑살 엄청 예민하잖아요. 일제시대에 고문할 때도 거기다 바늘 찌르고 그랬다고 하잖아요. 으으 생각만 해도 싫어요.”    


 스쳐가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그녀로 보인 건 언제부터였을까.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릴 때부터? 예상 도착 시간이 30분이나 이르지만 대문을 열고 나선 그때? 아니면 눈을 뜨고 티비를 켰을 때? 막상 그녀가 들어오는 걸 본 순간부터 정작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시선이 어색하지 않은 척. 그게 그의 현재 과제다. 그녀를 볼 때는 언제나 무심한 척 태연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그녀가 ‘척’이라는 걸 모르게 하는 것까지가 과제의 정확한 범위다.


“자꾸 깎다 보면 괜찮아. 근데 손은 못생겨지긴 하지. 개구리 발 같이 끝이 넓적해져. 배우지 마.”   

  


그가 자기 손을 바라보며 얘기하다 손을 탁자에 올려 둔다. 그녀는 그의 손을 바라본다. 손톱을 바싹 깎은 뭉툭한 손. 손톱을 계속 바싹 깎으면 그 밑살에도 살짝 굳은살이 생기는구나.  과제를 잠시 잊었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톱 밑으로 손가락을 살짝 대본다.


 이 어려운 사람의 손을 만져본다. 영원처럼. 손톱을 살짝 쓰다듬는다. 그녀의 의식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멈춘다. 그의 손톱만이 그 세상의 전부다. 불빛도, 술잔도, 다른 이들의 대화 소리도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그조차도 정지했다. 오로지 그의 손톱만을 만지고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찰나이면서 영원보다도 긴 시간. 그 어떤 만짐보다도 오래 기억되고 애틋할 만짐. 그것은 한참 지난 후에 깨달을 일이다. 지금은 그저 손톱을 바라보고 쓰다듬을 뿐.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수 없이 많은 만짐과 강렬한 순간. 그녀는 정말로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와의 모든 시간들이 지나간 뒤에 가장 자주 따뜻하게 온 마음을 다한, 자신의 모든 ‘척’들을 걷어낸 순간으로 떠오를 것임을.      


“이렇게 짧게 깎으면 진짜 안 아파요?”     

 

손톱에게 말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건 그의 손톱이구나. 그 생각이 그제야 같이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다시 과제를 떠올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마주친 그의 눈 안에서 당황한 표정이 얼핏 스친다.


그도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살짝 기른 손톱이 잘 정리되어 있는 손. 자신의 손톱과 닿아 있는 두 번째 손가락. 그 손가락에 끼워진 유럽여행에서 샀다는 반지를 따라 팔을 따라 어깨를 따라 목을 따라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손톱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신기한 것을 바라본다는 듯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 따뜻함이 가득 찬 얼굴. 편안함이 투명하게 묻어 나오는 얼굴. 그의 세상도 영원처럼 멈췄다.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한다.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대화와 시선 교환. 그 어떤 얼굴보다도 오래 기억될 얼굴. 그 또한 이 순간만큼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한참 지난 후에 깨달을 일이다. 그저 지금은 그 얼굴을 바라볼 뿐. 따스한 사랑이 담겨 있는 얼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자신의 모든 ‘척’들을 걷어내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질문과 함께 그의 시간도 다시 움직인다. 그는 과제를 떠올리며 다시 가면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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