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이면서 영원인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만나러 오는 길부터? 아니면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던 시간부터? 아니면 오늘 아침부터? 지금 엑스레이를 찍어본다면 아마 그녀의 속은 심장으로 꽉 차있을 것만 같다. 어찌나 열심히 뛰는지 가만히 둔 손이 심장박동에 쿵쿵 떨리는 것만 같다. 그 손이 떨리지 않는 척. 그게 그녀의 현재 과제다. 그를 볼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편안한 척하고 물론 그가 ‘척’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까지가 과제의 정확한 범위다.
“기타 배우고 싶긴 한데 저는 손톱을 바싹 깎으면 그 느낌이 너무 싫어요. 약간 아프기도 하고, 손 밑살 엄청 예민하잖아요. 일제시대에 고문할 때도 거기다 바늘 찌르고 그랬다고 하잖아요. 으으 생각만 해도 싫어요.”
스쳐가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그녀로 보인 건 언제부터였을까.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릴 때부터? 예상 도착 시간이 30분이나 이르지만 대문을 열고 나선 그때? 아니면 눈을 뜨고 티비를 켰을 때? 막상 그녀가 들어오는 걸 본 순간부터 정작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시선이 어색하지 않은 척. 그게 그의 현재 과제다. 그녀를 볼 때는 언제나 무심한 척 태연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그녀가 ‘척’이라는 걸 모르게 하는 것까지가 과제의 정확한 범위다.
“자꾸 깎다 보면 괜찮아. 근데 손은 못생겨지긴 하지. 개구리 발 같이 끝이 넓적해져. 배우지 마.”
그가 자기 손을 바라보며 얘기하다 손을 탁자에 올려 둔다. 그녀는 그의 손을 바라본다. 손톱을 바싹 깎은 뭉툭한 손. 손톱을 계속 바싹 깎으면 그 밑살에도 살짝 굳은살이 생기는구나. 과제를 잠시 잊었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톱 밑으로 손가락을 살짝 대본다.
이 어려운 사람의 손을 만져본다. 영원처럼. 손톱을 살짝 쓰다듬는다. 그녀의 의식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멈춘다. 그의 손톱만이 그 세상의 전부다. 불빛도, 술잔도, 다른 이들의 대화 소리도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그조차도 정지했다. 오로지 그의 손톱만을 만지고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찰나이면서 영원보다도 긴 시간. 그 어떤 만짐보다도 오래 기억되고 애틋할 만짐. 그것은 한참 지난 후에 깨달을 일이다. 지금은 그저 손톱을 바라보고 쓰다듬을 뿐.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수 없이 많은 만짐과 강렬한 순간. 그녀는 정말로 그 순간만큼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와의 모든 시간들이 지나간 뒤에 가장 자주 따뜻하게 온 마음을 다한, 자신의 모든 ‘척’들을 걷어낸 순간으로 떠오를 것임을.
“이렇게 짧게 깎으면 진짜 안 아파요?”
손톱에게 말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건 그의 손톱이구나. 그 생각이 그제야 같이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다시 과제를 떠올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마주친 그의 눈 안에서 당황한 표정이 얼핏 스친다.
그도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살짝 기른 손톱이 잘 정리되어 있는 손. 자신의 손톱과 닿아 있는 두 번째 손가락. 그 손가락에 끼워진 유럽여행에서 샀다는 반지를 따라 팔을 따라 어깨를 따라 목을 따라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손톱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신기한 것을 바라본다는 듯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 따뜻함이 가득 찬 얼굴. 편안함이 투명하게 묻어 나오는 얼굴. 그의 세상도 영원처럼 멈췄다.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한다.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대화와 시선 교환. 그 어떤 얼굴보다도 오래 기억될 얼굴. 그 또한 이 순간만큼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한참 지난 후에 깨달을 일이다. 그저 지금은 그 얼굴을 바라볼 뿐. 따스한 사랑이 담겨 있는 얼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자신의 모든 ‘척’들을 걷어내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질문과 함께 그의 시간도 다시 움직인다. 그는 과제를 떠올리며 다시 가면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