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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Dec 29. 2018

잠들 수 없던 밤의 조각

독서의 작용 또는 부작용




낮에는 정신을 차려야 해서 몇 잔인지 셀 수 없이 마셨던 커피는 정작 밤에 자려고 누우니 효과가 나타나는 듯했다. 그래도 몸은 피곤해서 어쩌면 잘 것 같기도 해서 불을 끄고 누워 독서등을 켜고 책을 펼쳤다. 시인은 미인과 바닷가로 놀러 갔다. 그 장면이 한동안 잊고 있던 속초의 기억을 불러왔다. 기억이 머리칼에 붙어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휘저으며 책을 덮어서 다른 지점을 갈라 펼쳤다. 시인은 사랑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게 되거나 이미 떠나버렸거나. 그 글이 또다시 한동안 잊고 있던 사랑의 시작을 온몸으로 깨닫던 순간을 불러왔다.

 


그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여러모로 초라한 처지를 곱씹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냐는 그의 목소리는 취기가 가득했다. 나는 이력서 넣은 것도 다 떨어지고 좀 전에는 폐인처럼 길을 가다 여자 친구와 같이 가는 전남친과 정면으로 마주쳐서 방구석에서 찌질거리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다 말했더니 회사 회식에서 선배들 분위기를 맞춰 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는 눈 오는 것 알고 있냐고 밖에 나와 보면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술이나 사러 나가면 모를까 눈 맞으러 나갈 정도로 낭만적인 정신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내 주접에 그는 웃으며 술은 언제든 사 줄 테니 연락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는 막상 밖이 궁금해 방바닥만 보던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봤다. 희미하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걸어가 늘 보던 바깥 풍경을 살폈다. 눈발은 점점 굵어져 꽤 많이 내렸다. 한참을 멍하니 눈과 눈 사이의 캄캄한 하늘을 보다가 알았다. 백수가 될까 두려워하고 초라해 보였던 것 같아 속 시끄러웠던 내가 그와의 전화 내용을 떠올리며 웃고 있다는 걸. 



잠들려고 읽은 책은 넘기는 페이지마다 그와의 기억을 불러와 책을 덮고 그냥 눈을 감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몽롱한 상태로 거기서부터 시작해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속을 떠다녔다. 바닷가에 있다가 막걸릿집에 있다가 그와 손깍지를 끼고 있다가 지하철역에 나란히 서 있다가 입을 맞추었다가 택시를 잡으러 서 있다가 노래방을 갔다가 곳곳을 옮겨 다녔다. 

#1. 그와 헤어지고 한 낮이지만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 몇 시간 전 그가 잡은 내 손을, 그 감촉을 떠올린다. 그에게 잘 보이려고 평소에 뿌리지도 않던 향수를 뿌리고 갔는데 그 향이 여전히 내 몸에 남아 그 감촉을 더 생생하게 한다. 향수를 뿌리기 전 몇 번이나 들었다 내려놓았던 것을 생각한다. 뿌리고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2. 할매집을 철거하고 있다. 추억이 사라지는구나. 그가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뭘 지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관계는 다 부수어졌다. 이제 그는 나에게 축의금 부탁도 할 수 없고 나는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할매집이 없어지고 있는데도 연락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내가 바란 것은 이게 정말로 아니었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이게 최선의 결과인 걸까. 기억은 순서대로 저장되지 않는다. 뇌 곳곳에 지 맘대로 분류되어서 흩어져 있다. 어느 날 내 꿈속에서 꿈이 아니어도 그 조각들이 지마음대로 뛰쳐나와 까불었다. 까불고 있다. 나는 후회하지 않고 후회를 조금씩 섞으면서 과거를 되짚어 본다. 어떤 날은 그게 최선이었다가 어떤 날은 최악이었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고 관계는 부수어지고 할매집도 허물어지고 있다. 내 과거 돌리기도 흩어질 것이다. 우리 관계처럼. 다만...... 내가 정말 잘한 것이라고 나는 믿어야 된다.   

   


어떤 날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야만 견딜 수 있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어렴풋이 눈치를 챘던 친구들은 모두 아쉬워했지만. 나도 어느 날은 아쉬웠다. 이렇게 산산이 흩어질 관계를 지킨답시고 말하지 못했다니. 그렇지만 커피의 힘을 빌려 기억 속을 떠다니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것. 그조차도 모르는 내 것. 사랑의 시작은 알았지만 끝은 알 수 없었던 것.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애써 맞다고 우기지 않겠지만 정말로 벅차도록 설레고 행복했고 심장이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을 만큼 두근거렸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그건 그와의 시간이 너무도 찰나였기 때문이고 그가 한 번도 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시간들은 언제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고 언제 다시 주어질지 알 수 없어서 마음에 깊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꺼내고 꺼내도 계속 마음 한 구석에 흉처럼 만져졌다. 내 기억에만 곱게 포장되어 있는 것. 시작도 못 해 본 씨앗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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