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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an 03. 2019

모래바닥에 있던

마음에 들어가는 날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발밑이 마른 모래사장 무너지듯 스르르 꺼지는 느낌이 드는 때. 

단단한 기반을 딛고 살기 위해 바닥을 단단히 잘 다져 오고 있었다고 자부하던, 단계를 잘 밟아 가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난날들은 그 순간 바로 내 발목을 땅속으로 잡아당긴다. 기억하는 한 처음 그런 느낌이 든 순간은 스무 살이던 해 과외를 하러 가려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건너편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 내 옆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익숙해 보였고 평화로워 보였는데 나만 어리바리하고 속이 시린 사람 같았다. 그저 사람 사는 곳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서울에, 익숙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초대받지도 못했으면서 끼어든 이방인 같았다. 해 질 녘 가도 가도 적응이 안 되는 주택가 어느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따뜻한 햇빛 뒤로 등이 시렸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엄마, 아빠를 살짝 서운하게 하면서 한 결정이 고작 이런 거였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나는 내딛는 바닥이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해가 다 지고 지하철에서 내려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기숙사에서 서울로 오는 것 그게 고작 목표였던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싸이월드에 끼적였다. 거기에 과 선배가 그게 뭐 어떠냐고 나도 그게 목표였다고 댓글을 달아줬다. 그 덕에 등 뒤가 조금은 따뜻해졌지만 바닥이 단단하지 못함을 느낀 뒤로는 언제고 갑자기 그 느낌이 찾아오곤 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려고 짐을 한 박스 안에 다 욱여넣었을 때, 방학이 끝나고 다시 기숙사로 올라와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에서 컴퓨터 선을 헷갈려서 잘못 끼웠을 때, 방학마다 그 기분들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기어이 엄마를 서운하게 하면서 본가에 가지 않았을 때, 그 이듬해 엄마가 아파서 하던 알바를 갑자기 그만두고 본가로 내려가던 길에 아무리 발에 힘을 주고 서 있으려고 해도 발밑이 흩어졌다.     



그때는 취직만 하면 더 이상 이런 느낌을 느끼지 않아도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돈을  스스로 벌어서 내가 살 곳을 마련하고 유지할 수 있으면 바닥이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지도 모르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문득문득 드는 그 느낌들을 외면할 수 있었지만 힘들여 겨우 바라는 곳에 도달해서도 발밑이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든 순간 대충 덮어 뒀던 나 스스로를 향한 미움의 감정이 쏟아졌다. 스무 살 지하철 역 앞에서 느꼈던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해 온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다고 한심한 고집일 뿐이었다고 그 고집으로 얻은 건 너 하나 겨우 누울 방 한 칸 하나가 전부라고.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어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망연히 내 방을 둘러봤다. 짐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지고 정신없는, 온기도 없는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더 먼 곳으로 떠나기도 무서워 어쩔 줄을 몰랐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잘 살겠다고 이까지 온 것 아닌가. 여기까지 오면 괜찮을 거라고 내가 생각한 대로 될 거라고 도달한 곳에서도 여전히 발밑이 다 헐어 무너질 것 같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갑자기 낯설어진 방 안을 바라보다가 정리하지도 못하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뒀던 책들 중에 하나를 펼쳤다.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한참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람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 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 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다시 등 뒤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한 말도 아니었지만 단단한 바닥이어야 한다고 마음처럼 꼭 맞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더 초라해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두리번거리던 나를 어르신은 진정시켜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준이 씨도 말했다. 늘 “지나 봐라. 그때가 제일 좋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라고 말하는 어른들만 만나다 이런 말을 들어서 충격이었다고 했다. 준이 씨 덕분에 나도 따뜻한 말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날만큼은 내 발 밑은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바닥이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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