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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Feb 14. 2019

드라이어 없는 삶

구겨진 마음을 펴는 




얼마 전 친구의 신혼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가 드라이어를 선물로 줬다. 갑자기 왜 이걸 나한테 주냐 물으니 언젠간 드라이어를 하나 주고 싶었다고 했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자취를 하는 바람에 하루 이틀씩 자고 가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자취방에 와서 자고 가는 친구들이 가장 불편했던 건 이불도 베개도 웃풍도 아닌 드라이어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쓸 일이 없었던 그때는 친구용 드라이어를 산다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친구들이 드라이어를 찾을 때마다 선풍기를 가리켰다. 그러다 사정상 내 방에서 몇 주 자야 했던 친구가 술 마시고 들어오던 길에 답답해서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사온 드라이어가 생겼고 그다음부터 친구들은 적어도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지는 않아도 됐다. 그런데 그 드라이어도 영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제 내 방에 와서 자고 갈 일도 없는데 더 좋은 드라이어를 샀다며 집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드라이어 박스를 품에 안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드라이어를 언제부터 쓰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복학하고부터였다. 쓰다 고장 나서 버리고는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드라이어를 살 돈까지는 없는 것 같아서 취업하면 사야지 하고는 그 길로 드라이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때는 여유가 생기면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유라는 게 금방 오는 건 아니었다. 안 써 버릇하니 이제 드라이어를 살 정도의 돈이 있는데도 안 사게 되었다. 드라이어가 없다고 뭐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손으로 말리고 선풍기로 말리고 할 만했다. 삶의 질이 미세하게 떨어진 정도니까. 그런데 미세하게 조금씩 떨어뜨리는 삶의 질이 계속 습관이 되어갔다. 돈이 여유를 불러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여유가 생기면 하리라 다짐했던 것들을 돈을 벌게 돼도 계속 미루고 또 미루게 되었다. 귀찮아서 안 사는 것처럼. 없어도 잘 사는데 왜 굳이 사야 돼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 미룸은 여지없이 책 하나 사는 것도 영화 하나 보는 것도 망설이게 했다. 왜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싶었는데- 마음껏 사고 싶은 책 사고 영화 보고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싶어서 한 건데 돈을 벌어도 여전히 관성이 남아 미루고 삶의 질을 조금 떨어뜨리며 참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조금 더 벌면 조금 더 안정되면 그때 해야지. 학생 때 하던 다짐에 ‘조금 더’ 만 추가해서 계속 중얼거리는 삶.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찾아보기만 하고, 적어두기만 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거 쓴다고 돈이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환경은 바뀌어도 여전히 한 달에 20만 원 남짓으로 생활하던 그때의 쪼그라든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 마음을 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을 조금씩 해 보면서, 친구를 잘 둔 덕에 드라이어를 왜 사용하는지 알게 되면서. 지금 생각하면 굶어 죽을 정도로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자취하는 대학생의 서러움과 낭만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정도였는데 지금도 아직 다 펴진 것 같지는 않다.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시연이 아역 배우를 할 때는 집에 돈이 아주 많았는데 시연이 서서히 인기가 없어지면서 집도 점점 가난해졌다. 그런데 시연이 아주 유명한 감독의 영화를 찍고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시연의 엄마는 아역배우를 하던 시연이 성인 비디오에 출연할 만큼 시간이 지나 만지게 된 큰돈에 신나서 소파, 장롱, 냉장고 등을 산다. 가구들이 들어온 날 가족들은 집 크기에 맞지 않는 가구 때문에 불편하다고 투덜거리고 시연 엄마는 엉엉 운다. 돈을 안 써 버릇 하니 쓸 줄도 모르게 됐다고. 시연은 짜증을 내면서 가구들을 다 반품하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상대적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돈만큼 상대적인 개념도 없을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단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돈이 조금 더 생기면 다 해결될 거라고 쉬이 말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가난이라는 것이 단지 돈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예를 들면 수능 전 날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대학에 보내 줄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아들의 몸에 있는 큰 흉을 치료할 여유가 없어 훗날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한참 망설이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며 난방비를 고민하다 발에 동상이 걸리는 줄도 모르고 걸리는 것이고 동상에 걸려도 따뜻한 털신 하나 사는 것도 고민하는 것이고 아들의 꿈에 대해 들어줄 여유가 없어 말하기도 전에 침묵하게 되는 것이고 슬퍼 우는 친구의 눈물을 닦아 주고 위로해 줄 술 한 잔을 사줄 돈을 망설이게 되는 것이고 못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고 당장 일주일 뒤의 의식주를 온 힘을 다해 걱정해야 하는 것이고 아들이 몸이 아파 당장 신열에 앓아도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고 몸이 약한 아들의 예방접종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돈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까지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이고,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몇 달 몇 년의 계획을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여유 없음을 치부로 여겨야 할 때도 있으며 그것들을 이겨내고 일을 행해도 때로는 숨겨진 이야기를 알 수 없는 이들의 호기심과 의아함, 비난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나날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이 이어진다는 것, 또 끝나도 끝난 줄 모르고 관성처럼 고민하며 여유 없는 삶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며 지극히 사적이지만 너무도 쉽게 타인에 의해 판단되어 버리는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가볍게 입을 열어 희망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들은 대학에 가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고, 그 흉을 사랑하는 이가 따뜻하게 바라보며 예쁘다고 어루만져 줄 수 있으며 동상에 걸린 발을 조금 더 따뜻하게 감싸 있다 보니 몇 해 겨울이 지나 아물게 되고 아들의 꿈을 대신 들어준 선생님 덕분에 아들의 꿈을 조금 늦게 라도 알게 될 수 있고 슬퍼 우는 친구와 같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우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고 조금 힘이 나는 날에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이에게 의지하고 또 의지가 될 수 있음을. 결국은 흔해 빠진 결론이지만 생채기도 흉도 치유도 사람과 시간이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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