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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n 16. 2018

어젯밤 당신과의 통화

일상을 말하다






어젯밤 당신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방금 집에 들어온 참이었어요.     



“여보세요? 응. 나 이제 막 집에 왔어요.”


“나 빗속을 질주했어요.” 


“엄청 긴 거리는 아니었고 걸어서 한 10분쯤 되는 거리였어요. 처음에는 옆 처마로 조금씩 옮겨 가다가 편의점을 찾아 우산을 살 계획이었는데 조금씩 옮기다 보니까 그냥 갈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서서히 가속도를 붙여서 난데없이 빗속을 질주하게 된 거죠. 걸어올 때 가까웠다고 생각했는데 빗속을 뛰려니 생각만큼 가깝지는 않았어요.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빗물이 고인 곳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뛰어가니까 게임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리고 내리는 비의 양보다는 내가 많이 젖지 않는 것 같았어요. 물 고인 곳도 몇 번 밟았는데 운동화도 거의 젖지 않은 것 같았고 머리도 옷도 생각보다 젖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씩씩함으로 무장한 게이머였다고 볼 수 있죠. 아이템도 하나 없이 질주하는. 

드디어 지하철 출구가 보이고 그 빛 속으로 뛰어든 순간 곧바로 옷과 머리에서 축축함이 느껴지더라구요. 사람들의 시선도.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강아지처럼 머리를 털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운동화도 젖었더라구요. 

지하철을 타서 거울을 보니 앞머리가 완전 물에 젖어서 누가 봐도 비 맞은 사람이더라구요. 물론 나는 비를 맞은 사람은 맞지만 별로 티가 안 나는 줄, 비가 나를 많이 젖게 하지는 못한 줄 알았거든요. 

전혀 아니었어요. 옷도 꽤나 축축하고 많이 젖어서 혹시나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어쨌거나 이제 와서 우산을 살 수는 없어서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버스정류장까지 열심히 뛰었죠. 이상하게 빗속을 뛰는 순간에는 내 몸의 찝찝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막 상쾌해. 지하철보다는 내가 더 젖었고 비보다는 내가 덜 젖어서일까. 버스는 금방 왔어요. 버스를 타니까 다시 내가 더 축축해서 찝찝해졌어요. 

버스 안이 습도로 가득 차서 창문이 뿌옇게 되어서 불빛들만 흐릿하게 보였어요. 

세 정거장이 지나고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그제야 비가 그친 거 있죠.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는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갔어요. 나는 허무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냥 처마 밑에 좀 서있다 천천히 올 걸- 우산 안 사고 뛰어오길 잘했다. 잘했다 못했다 오락가락하면서 집으로 들어왔어요.”


 “이 옷을 입은 채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티비도 보고 그러다 젖은 옷이 마르면 빨래통에 넣어두고 깨끗이 씻어야죠. 씻는 보람이 느껴질 것 같아요. 지금 엄청 꼬질꼬질하거든요. 그러고는 살짝 시원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서 자야죠. 아주 금방 곯아떨어질 거 같아요. 쿨쿨”     



뭐 그런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남들은 말할지 모르지만

당신에게는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지요. 

아주 심각하고 슬픈 이야기부터 너무도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참 고마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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