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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n 14. 2018

시시한 독백

들어줄 사람 없는 변명






그 건물이 다른 회사로 바뀌었더라. 그런 건 쉽게 바뀌지 않는 줄 알았는데. 홍대에서 옷가게가 술집으로 다시 식당으로 바뀌는 것만큼 금방 바뀌었다. 자주 지나가진 않았지만 지나갈 때마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여기서 일하고 있겠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전날에 나는 그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연락했었다. 그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도. 나는 초라해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기다릴 계획을 세우고 주변을 걸었다. 우연히 만날 수도 있으니까. 친구는 금방 나왔다. 친구 상사들은 다 오늘 쉰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꽤 오래 수다를 떨었다. 시답잖은 소리들. 낄낄거리면서도 등 뒤가 계속 시렸다. 핸드폰에 온 감각이 들러붙어 있었다. 


결국 그는 내가 거기를 떠나고 있을 때에야 연락이 왔다. 그나마 보지도 못했다. 일 때문에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이런 날 바쁘다니 안 됐네요. 다음에 봐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전화를 끊고 꽤 긴 거리를 걸었다. 지하철로  4~5 정거장쯤.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울기에는 너무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 감정 기복에도 한계가 있지 낄낄거리다 갑자기 펑펑 울 수 없었다. 그랬으면 정말 볼 만했을 텐데. 이게 그 장소에 있던 그와의 추억의 전부다. 그 사람과의 추억도 아니지. 나 혼자 기억하는 장면이다. 그러면서도 가끔, 그의 추억들 가장자리 즈음 이 통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없는 기대가 들 때도 있다.

 


이런 그에 대한 궁상맞은 생각은 한도 끝도 없어서 어느 날 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영화나 드라마에 가끔 나오는 그 상황에서 이렇게 했으면 그와 내가 잘 될 수 있었을까 상상하는 장면들을 볼 때마다 그가 떠오르는데 그런 상상이 초라하다기보다는 ‘이렇게 했으면’이 상상이 안 돼서 초라했다. 그와 나 사이에서 그런 순간은 대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어렴풋이 그런 순간을 더듬어 찾아내도 그때 내가 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순간들에 내가 했던 행동들, 끝내 하지 않은 말들을 잘했다고 칭찬해 줄만한 그와 나 사이의 엮인 관계들이 줄줄이 딸려오니까. 

다 너무 사소하고 부질없어서 금방 부서지고 말지만. 

그 순간 다시 초라해진다. 왜 저렇게 쉽게 부서지는 사소하고 부질없는 이유들 때문에 그에게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못했는지. 


언젠가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네팔까지 갔었다. 그랬는데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책망하는 사람도 없는데 핑계를 대고 싶다. 왜 말하지 못했는지. 

누군가를 짝사랑하면 흔히 하는 상상들. 사귀면 이러지 않을까 하는 것들을 그와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까우면서도 어려웠던 사람.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고 있었으면서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손잡는 것조차도. 

그 사람이 나에게 모질게 하는 상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끝끝내 나는 초라해지기만 했다. 

내 상상 속에서 조차도. 

그래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노라고 변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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