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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l 27. 2019

고백을 앞둔 이에게

오래전 나에게 하는 사과 그리고




라디오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DJ와 시인이 사연을 읽고 조용조용 대화하는 소리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각사각 펜 소리가 섞였다. 사연은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연을 들으며 고민이 많겠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해도 후회고 안 해도 후회니 용감하게 고백하라는 조언을 할 줄 알았는데 시인은 한참 머뭇거리다 고백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했다. DJ도 공감하며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고백을 받는 입장에서 갑자기 네 인생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거니까 지금까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부수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 말에 예상치 못하게 고백을 받았던 순간들이 떠올라 펜을 멈추고 허공을 봤다.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20대 초반 여럿이서 몰려다니며 놀았다. 그저 단지 같은 학교라서 같은 동아리라서 그거면 충분했다. 다 같이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당구장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시간을 퍼내고 퍼내도 남는 물처럼 노는 데 썼다. 타지로 와서 외로웠던 나에게 든든한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친구들 중 누군가에게 갑자기 고백을 받았다. 정말 갑자기였다. 그는 휴가 나온 말년병장이었고 나는 불쌍한 군인에게 고기를 사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그는 고기를 먹다 말고 사실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말로 거절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갑작스러운 말이 우리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접을 조금 떨면서 거절했지만 역시나 이미 그 말이 우리 사이에 맴돈 순간 관계는 어떻게 해도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 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약자고 거절을 한다면 내가 상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 뒤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속상한 감정이 있었다. 고백을 거절하면 아무리 완곡하게 거절하고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해도 다시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게 서운했다. 길다면 긴 친구로 지낸 시간들이 한순간에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은지 고백을 할 때 이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했는지.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이런 생각은 배부른 소리지 그럼에도 용기를 낸 거겠지 엄청 고민하고 떨렸겠지 상대방도 자책하고 있겠지. 양 끝의 감정 위를 오락가락하다 후자로 결론 내리곤 했다.   



내 불편한 감정의 이유가 시인의 입에서 나오니 오래전 감정인데도 그제야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시인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야 하고 사랑을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다만 너무 나의 감정만을 갑작스럽게 내어 놓아서는 안 되고 상대의 마음도 헤아려 봐야 한다고. 시인은 자신이 고백을 할 때는 그의 책 제목처럼 늘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는 농담을 던지며 좋은 결과 있었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그렇게 라디오 코너가 끝나고 나 자신에게 의문이 생겼다. 그 사람이 상처 받고 아프다고 내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왜 입 속에 꾹꾹 넣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남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화가 났었고 서운했고 따지고 싶었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까지야 없었겠지만 내 감정들을 나조차도 보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에 그제야 나에게 미안했다.      



고백을 하려 마음먹으면 얼마나 떨리고 설렐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 그래서 그 순간을 말하는 노래도 드라마도 많지만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고백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 많이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거절과 상관없이 고마워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는지도. 그날 고개 푹 숙이고 돌아갔을 그도 짠했지만 나도 짠했다고 수년이 흘러서 이제야 인정한다.  

    

어렵고 떨리고 긴장되겠지만 고백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아는 것. 넘치는 사랑과 마음을 주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알아줬으면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부담과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아는 것. 내 욕심으로 강요하지 않는 것. 연인 사이에서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시작인 고백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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