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차게 설레는 순간
Y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춥고 또 춥던 그 날.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먼지 같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누가 내뿜는 가벼운 숨 한 번에 저 우주 밖으로 밀려 날 수 있는 그런 먼지. 게다가 미래에 먼지를 벗어나긴커녕 먼지 중에 1등 먼지가 되거나 최소한 누군가의 입김에 밀려나지 않는 거대한 먼지조차도 될 수 없는 처지라고. Y는 오래오래 입어서 소매가 다 헤진 점퍼 안으로 손을 웅크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지만 연말연시에 만나기에 적합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추운지도 몰랐다.
평소 같으면 원래 Y의 습관대로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와의 대화를 복기하고 그가 한 말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답도 없는 문제 풀이를 하느라 마음 한 구석이 시리고 초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Y의 머릿속은 B의 생일을 생각하느라 조금 전의 만남은 이미 기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7분 후면 B의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보내볼까. 보내면 혹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알아주면 좋은 거 아닐까. 부담스럽게 느끼진 않을까. 혼란스러운 질문 꼬리잡기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너무 추워서 코가 시렸다. 망설임과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수많은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문득 휴대폰을 꺼내보니 하필 12시 1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완벽한 시간에 휴대폰을 꺼낼 수 있는지. 손끝, 코끝, 발끝이 시렸지만 썼던 문장을 지우고 조사를 바꾸고 다시 문장을 쓰고 단어를 바꿔서 완성한 겨우 두 문장을 전송했다.
-생일 축하해! 생일인데 뭐해?
그리고는 집에 가기 전에 꼭 답장이 올 거라고 다짐인지 예감인지 알 수 없는 추측을 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Y의 뒷모습은 급격히 느릿해졌다. 미적미적 한 발 한 발 보도블록 금을 밟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마침내 도착한 사거리에서 조금 서둘러 걸었으면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 신호를 한 번 보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순간 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 호들갑을 떨면서 전화기를 꺼냈다. 발신자는 동생. 1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하는 녀석이 하필 이 타이밍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괜히 짜증이 밀려와 답장도 하지 않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걷고 있으니 진동이 계속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 번 더 꺼냈는데 만약 또 B가 아니라면 정말 초라할 것 같아서 Y는 전화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한 발씩 천천히 내디뎠다. 속도는 점점 느려져서 이제 거의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몇 시인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보니 B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Y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코 안으로 지나 폐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넌 뭐해?
Y는 아예 걸음을 멈추고 답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부지런히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 집에 가는 길. 되게 춥다 오늘.
B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혹시 우리 집 근처 지났어? 아니면 잠깐 들릴래? 어머니께서 반찬을 엄청 보내주셨거든. 좀 가져갈래?
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Y는 온 힘을 다해 B의 집 방향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속도에 불어오던 바람이 더 매서워졌다. 달리기에 영 소질이 없는 Y는 금세 숨이 차올랐다. 그런데 그게 꼭 달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런 벅차 오는 느낌이 인생에서 결코 자주 올 수 있는 순간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Y는 B에게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답장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발걸음이 꾸역꾸역 느려졌던 것도 사실은 B의 집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B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그러니 Y는 달렸다. 신호가 아슬아슬 남은 횡단보도를 건너서 보도블록 금 따위는 상관없이 보폭을 최대한 넓게 해서.
그때도 Y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았다. 이토록 완벽한 순간. 뜨거워진 볼을 식혀주는 차가운 온도의 완벽한 공기. 새카맣고 반짝이는 완벽한 하늘. B의 완벽한 답장. 그리고 하찮은 먼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존재가 되었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