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 카레를 먹자
호텔에 도착해서도 눈이 펑펑 내렸다. 큰 눈송이들이 펑펑 내려오는 것을 호텔 창문으로 구경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은 가득 들뜨기로 했다. 캐리어 정리를 하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르지만 천천히 걸어서 시내로 나가 볼 생각이었다. 호텔 옆에 큰 공원을 가로질러 골목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우산을 하나 사려다 내일은 눈 예보가 없어서 관두고 대신 눈을 가득 맞기로 했다. 가볍게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자이기에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은 없는 편이 나았다. 외투 모자를 뒤집어쓰고 나와 걷기 시작했다. 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믿기지 않게 어둑해진 풍경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거닐며 눈을 맞았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그리 낭만적인 모습은 아니었겠지만, 나에게는 기억 중 몇 안 되는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늦지 않게 저녁을 먹으러 왔다. 눈을 실컷 맞은 날은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오늘은 수프 카레를 먹는다,라고 호텔을 나오면서 정해두었다. 미리 찜 쳐둔 가게로 도착했다. 삿포로 시내에 있는 2층에 위치한 가게였다. 마침 오픈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난 시간이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가고 웨이팅 없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따뜻하고 얼큰한 수프 카레, 8년 전 수프 카레를 처음 먹곤 그 맛에 푹 빠져 살았다. 국물 요리를 좋아하는 내겐 수많은 카레 메뉴 중 단연 최고였다.
오랜만의 삿포로에서 수프 카레를 먹기 완벽한 오늘, 후기를 찾아봤을 때 카레의 야채들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함께 주는 가라아게도 엄청 맛있다던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그 맛이 궁금해 얼른 주문하고 메뉴를 기다리며 가게를 구경했다. 캐주얼하고 귀여운 가게였다. 복작복작하고 따뜻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 곳, 첫 번째 외식으로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 빠르게 나온 수프카레와 밥,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최고였다. 먼저 밥 위엔 가라아게가 올라가 있었는데, 갓 튀긴 닭튀김이라니, 이만큼 소중하게 느껴지는 게 있을까.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뜨거움이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먹자 짭조름하고 작게 바삭한, 따뜻한 튀김이 뒤이어 촉촉한 닭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아, 맛있어! 가라아게 한 입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 작은 행복일까, 밖엔 눈이 내리고 나는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가라아게를 먹는 것은 꽤 큰 행복이 아닐까.
카레는 여러 가지 야채가 가득 올라가 있었다. 콩과 파프리카, 연근, 브로콜리, 당근, 단호박, 목이버섯 등 따로 익혀서 예쁘게 토핑이 되었다. 알록달록 예쁜 요리를 보니 마음이 화사해졌다. 대접받는 기분. 그리고 닭다리가 하나 올라가 있다. 이 닭다리는 엄청난 부드러움을 자랑하는데, 다리를 들고 뜯지 않고 숟가락으로도 충분히 뼈를 발라낼 수 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이 닭고기와 칼칼한 향신료가 가득한 수프 카레를 한 입에 같이 먹으면 정말 환상적인 콤비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닭이 너무 부드럽다 싶을 때, 위의 야채들을 하나씩 먹는다. 오독한 연근, 달콤한 단호박, 담백한 브로콜리, 고소한 콩 등 순서대로 하나씩 먹다 보면 어느새 카레가 바닥이 나있다. 어쩜 모든 재료들이 다 재미있고 맛있는지, 배가 안 고픈 상태에서도 한 그릇을 가뿐히 비우고 만다.
어느새 속이 따뜻해져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나는 조금 다르다. 커다란 닭다리와 알록달록 카레를 먹은 나는 걸어 다니는 횃불 같아서 주변을 다 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가게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