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누군가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아름답게 꾸미고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하루를 다짐하고
누군가는 허망한 자신을 보고 후회하고 좌절하고
누군가는 그런 자신조차 보기 싫어 외면한다.
하지만 거울은 알고 있다.
바로 보지 않으면 거울 속 존재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똑바로 마주 보아야
거울 속 존재는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 속에 진심을 담은 누군가
그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고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갈 길이 어딘지
그 길을
거울은 그의 얼굴로 비추고 있다.
" 웬일이니? 이렇게 화장을 다하고? 누구 만나?"
오늘따라 유달리 화장에 공을 들이는 내 옆에서 출근 준비 중이던 희경이 물어봤다.
나는 문득 머릿속에
' 오늘은 볼 수 있을까? 아님 먼저 연락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희경을 바라보자, 희경의 화장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메이크업 전문가는 다르구나. '
" 너 바빠? 바로 나가야 해?"
" 왜? 아직 한 15분 여유 있어. "
" 나 화장 좀. "
" 아주 미쳤구나. 어제도 술 먹고 늦게 연우한테 실려오더니 요번엔 언 놈인데?"
희경은 못내 못마땅했는지 내가 들었던 아이쉐도우를 뺏어서는 손에 들었다 바닥에 놓더니 파우더를 들고는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 이년. 안 되겠다. 기본이 안되었네. 말해. 내가 지각을 해도 꼭 들어야겠어. 언 놈이야? 너를 변장술 하게 만든 놈이."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희경이
" 어쭈?"
모처럼 지난번 연우가 사줬던 원피스를 입고 신발도 신고 그렇게 기분 좋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콧노래를 부르고 나름 한 바퀴 돌아보고 왠지 모를 설렘에 나는 문득 왜 이런 기분을 대학 1학년때는 못 느꼈을까란 생각이 들자, 다시 머릿속 지우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름 생각했다.
뭐 나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각박하게 삶에 쫓겨 그렇게 사는 세상에 내게도 한 번쯤은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까 아니 찾아온 게 아닐까.
혼자 그렇게 기분 좋아하며 도서관에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강의를 들으며 혼자 머릿속에는 무한 반복 꽃비를 뿌리며 콧노래까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앞에 앉자 내게 얼굴을 쓱 들이밀더니 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뺏어 듣는 게 아닌가.
" 이게 그렇게 재밌어? 콧노래 나올 만큼?"
그다.
어제 봤던 그. 내가 순간 정지된 채.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제처럼 아니 내가 그를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방긋 웃으며 의자에 다시 앉더니
" 묘한 취미를 가졌네. 연락도 안 하고 말이야? 사람 감질나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 아 어제는.."
" 쉿!"
누군가 옆에서 조용히 하라는 소리에 그는 내 손을 이끌었고 나는 얼결에 그에게 이끌려 도서관 내에 있는 계단으로 나왔다. 도서관 내부계단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소근소근 대는 목소리로.
" 어제는 초면에 제가 실례를... 미안해요."
" 응? 실례 아닌데?"
생각보다 큰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계단복도를 따라 울렸고 나는 놀라 그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쉿. 좀 조용히 말해요. 다 울려요.'
그러자 그가 조금은 줄어든 목소리로.
' 재주가 좋네?'
이렇게 말하며 나를 확 끌어당겼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마치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후우~~~.'
나는 긴 숨을 내뱉자, 그가
'떨려?'
라며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순간 내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자,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내리더니
'키스라도 할까 봐?'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동공에 지진이 와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어디 둘지를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눈알을 굴리고 그에게 붙잡힌 이 손을 어서 뿌리치고 다른 때 같으면 그렇게 뿌리치고 밀어내고 하는데 온몸은 마치 돌댕이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자 그가 내게 다가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순간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던 그가 웃으며 천천히 앉더니 내 어깨를 감싸고 일어나며
'당돌한 거 같더니 순진한 면도 있네.'
이러는 것이 아닌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얼굴은 꽤나 애 때어 보였다. 나이가 많아 봐야 나와 같거나 아니면 나보다 어리거나.
' 나보다 어린 거 같은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 이 타이밍에 나이가 중요해?'
이렇게 말하며 내게 천천히 입을 맞추는 가 싶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 노련하게. 천천히. 마치 배우 뺨치듯. 영화의 한 장면 마냥. 그는 그렇게 내게 다가와 내 판단력과 당돌함과 모든 생각을 정지시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쳐 냈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한번 쓱 대더니
' 전화해.'
이렇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도서관 옥상으로 거의 달리다 시피해서 도착한 그곳에서 크게 하아~ 숨을 쉬고. 다시 한번 하아~ 숨을 쉬었다.
'이건 뭐지? 정말 사랑인 건가. 꿈인 건가.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떡하지? '
전화를 해서 여기로 불러? 아니면 약속장소를 정해서 만나자고 할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 더 버틸까.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해가는데 도통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떠오른 이름. 희경.
" 희경아. 나 지금 진짜 급한데 잠깐 시간 돼?"
급히 희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희경은 전화기 너머로 세상이 떠나갈 듯 깔깔깔 대며 웃었다.
" 야 다 들려. 좀 조용히 웃어. 쪽팔리게."
전화기 너머 희경의 목소리.
" 야. 이제야 너 혼쭐 낼 인간이 나타났나 보네. 넌 좀 된통 당해봐야 해. 네가 경윤이 애간장 보통 녹였냐?"
" 야 거기서 경윤이 왜 나와. 이 상황에."
" 야. 이 미친년아. 순진해서는. 쯧쯧. 너 정신 똑바로 차려. 너 그러다 홀린다. 조심해라. 뚝."
' 허어. 도움이 안돼.
도움이. 내가 먼 생각으로 희경에게 전화를 해서 고자질을... 도대체 얼마나 나를 놀려먹을거리를 준거야. 아주 내가 제삿밥을 물어다 줬네. 자 잠시 정신을 차리자. 이미소. 다시 잘 생각해 보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니지. 그는 왜 자꾸 내게 전화를 하라고 하는 거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연락처만 덜렁 주고. 뭐 하자는 거지?
그래. 이게 너잖아? 그래. 천천히 생각해서 다시 집어 보자.'
마음은 이렇게 먹었는데 내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훗. 진작 전화하지. 어딘데?"
" 네? 아. 그러니까."
" 어디냐고."
" 여기 도서관 옥상인데요?"
" 기다려. 뚝."
그는 단 숨에 달려왔다.
그리고 숨을 헉헉 쉬더니 내 손을 잡고 다시 미친 듯 계단을 단숨에 내려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에 책이랑 짐을 그대로 내팽겨둔 채.
제법 그와 함께 달리며 나는 입에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미친 듯 달려 보는지. 육상대회에서 마치 결승선을 향해 달려갈 때의 그 기분.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미칠 것만 같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이 속도감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치 미친 것처럼 미칠 것처럼 달려 도착한 곳은 대학가 그의 자취방이었고 그렇게 그의 자취방에서 그날 그와 관계를 가졌다. 꿈같은 시간.
관계가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물었다.
" 이름?"
" 나? 재우. 넌?"
" 나? 미정."
" 훗. 매일 도서관에서 살아?"
" 응. 넌?"
" 음. 난 주 3일은 도서관. 주 4일은 집."
" 왜 4일은 집이야?"
" 응. 시험 준비해. 공무원."
" 공시생이구나. 왜 고시촌에 안 가고?"
" 뭐 하러? 귀찮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질척대는 것도."
그의 말을 듣고 방을 둘러보자, 책상 위 7급 공무원 수험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 책을 펼치자 그가 급히 일어나 책을 덮었다.
" 뭐 하러 봐. 이런 걸 재미없게. "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안아 다시 침대에 눕혔고 나는 다시 앉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 가? "
" 응. 알바 가야 해."
" 바쁘게 사는구나?"
" 응. 먹고 살려다 보니 그렇네."
" 내일 수업 언제 비어?"
" 음. 4,5교시?"
" 알았어. 잘 가."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그의 집을 나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후우.
크게 한숨을 쉬고 그렇게 다시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다음날.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여자들이 한 번씩 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뭐라고 수군대며 지나갔다.
그래서 바라보자, 재우가 서 있었다. 그는 등 뒤에서 장미 한 송이를 주며,
" 가자."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내 손을 이끌고는 내 달렸다.
어제처럼. 나는 왜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었을까. 왜 그의 손에는 그렇게 순순히 따라나서고 그가 하자는 대로 이끌려 갔을까. 그의 자취방 입구에 도착하자 방 앞에 하얀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 아이씨. 오늘은 안 되겠다. 미안. 너 그만 가줄래?"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돌아서 다시 도서관으로 와서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새벽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온갖 심리책을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남자의 심리', '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금성에서 온....' 오전 내 책상 위에 쌓아두었던 책을 읽고 핸드폰을 보고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수업에 갔다가 와서는 미처 읽지 못한 '인간의 심리학', '심리학의 기본'... 빠르게 속독으로 읽기 시작한 책들을 수업을 오가며 틈틈이 다시 보며, 수업에 들어가서도 보며 그렇게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읽어도 읽어도 답이 없었다.
이 수많은 책들. 아니 이 문장 어디엔가 앤들. 그의 이런 이상행동들에 대한 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막차시간이 다되어가는데도 그에게 답장도, 어떤 전화도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에게 연락이 온 건 그러니까 도서관 옥상에 찾아왔던 그날부터 정확히 5일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해 보라지. 어떤 기분인지. 얼마나 화나고 사람 미치게 만드는지를.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단숨에 달려왔다. 그리고 나를 다시 도서관 계단통로로 데려갔다.
' 왜 전화를 안 받아. 화나게. 헉. 헉. 헉. 헉'
그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고 숨이 몹시 차 있었다.
' 전화는 왜 안 하고 헉헉헉'
' 헉헉 '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천천히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팔짱을 끼고.
그러자 숨을 고르던 그가 다시 따라 올라왔다. 그러다 내가 도서관 옥상문을 열자 갑자기 나를 돌려세우며,
" 왜 보란 듯 뛰어내리기라도 하려고?"
" 무슨 말하는 거야? 이거 놔."
그렇게 그를 뿌리치고 옥상으로 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 너 알고 시작한 거잖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내가 니 장난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 나 너 만만하게 본 적 없어. 한 번도. "
" 그럼 내가 처음에 물었을 때 대답했어야지. 여자 친구가 있다고. "
" 그 말이... 그걸 물어본 말이었어? 크핫."
재우는 황당하게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며 그는 더 당당하게
" 네가 더 이상 묻지도 않았잖아?"
그의 말에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 그래. 이제 다시는 묻지 않을 거야. 너 상종도 안 할 거니까. "
내말을 들은 재우는 호주머니에 담배를 꺼내 물고는 길게 한숨 내 뱉고는 조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 그래. 뭐. 오는 여자 안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게 나니까. 편할 대로 해. 너 아니라도 여자는 많으니. "
그런 그에게 나는 당돌히
" 다행이네. 네가 놓친 게 나라서. "
" 뭐라고?"
" 다행이라고.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미치도록 가슴이 터지도록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람을 내 기억에서 스스로 지우게 되었거든. 방금. 넌 아웃이야. 새끼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내려와 짐을 싸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물끄러미 그렇게 화장대 거울을 보고 앉았다.
'왜 나는 연애를 길게 못하지? 왜 내게 사랑인 줄 알았던 네가 하필이면 다른 여자가 있는 사람인 걸 몰랐지? 왜 그런 그를 나는 사랑했었지?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는 알았지만 왜 되돌리거나 변명의 여지도 없이 나는 그냥 돌아섰지? '
애초에 거짓말을 한 것도 나였다.
난 이름을 속였고 그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속은 기분이 들지만 정확한 표현은 그는 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을 뿐이 아닌가. 왜 근데 나는 내 마음대로 그가 여자친구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왜 나는 이토록 미친 듯 화가 나고 그가 용서가 안 되는 걸까.'
꼴도 보기 싫을까. 그렇게 미친 듯 몇 달을 도서관에서 그를 기다렸으면서 정작 겨우 그와 함께 한 건. 고작.
모든 시간을 통 틀어도 채 하루도 아니 12시간도 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이토록 미치도록 배신감이 드는 걸까.
거울 속 나를 보니 나는 아직도 파르르 떨며 화가 나 있었다.
이게 이토록 내가 화낼 일인가.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난 그를 봤을 때 마치 마치....
꼭
꼭 마치 말이다.
거울 속
나를
보는 기분이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