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손님. 오늘은 안내드린 대로 배차가 안되네요. 죄송합니다. 뚝."
전화를 끊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세요. 대리기사님 지금 승차 거부하시는 거예요?"
" 손님 오늘은 스케줄이 다 차서요. 죄송합니다. 뚝."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주변이 조금 조용해 진걸 보니 어딘가 들어가 다시 내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 야. 왜 안되는데? 오늘 너 알바 다 끝난 시간인 거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어딘데? "
" 그건 손님이 알 필요 없으시고요. 다른 대리기사님 이용하시죠. 뚝."
두달 만에 연락온 연우의 전화를 그렇게 끊고 내가 향한 곳은 재우의 자취방.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그는 열심히 게임 중이다.
" 자기 왔어? 힘들었지?"
재우는 여전히 게임에 시선을 집중한 채 내게 말했다.
" 게임 좀 그만하고 밥도 좀 챙겨 먹고. "
나는 들어가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를 뒤에서 안아 그의 두 볼과 눈썹, 그리고 입술에 천천히 뽀뽀를 하고 또 천천히 진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
" 나 간다."
그러자 그가 목에 걸린 해드폰을 빼고는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며,
" 왜 벌써 가?"
" 얼굴 봤으니 됐어. 아 막차시간 늦었어. 서둘러야 해. "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냥 뒤돌아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할 때 멈춰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미친 듯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을 보자 성수동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막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가 싶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막 속도가 올라가려는 버스 앞을 가로막았다.
" 스톱!"
" 이 아가씨가... 그렇게 안 해도 세워주는 데 미쳤어요?"
" 헉헉헉헉. 헉헉헉헉. 죄송해요. 기사님.. 헉헉헉헉. 띡."
그렇게 나는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연우의 차가 보였고 연우는 차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나를 돌려세웠다.
" 너 나한테 화난 일이라도 있어?"
" 아뇨."
" 근데 연락은 왜 피하고 대리기사는 왜 안 하는데? 이 늦은 시각에 또 왜 늦게 오고. "
" 바빴고 일이 있었고 막차를 타서요."
" 그래. 바빴다는 것은 이해하겠어. 뭐 나도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일이 있었으니 대리도 거부한 거고 근데 무슨 일?"
" 데이트."
" 뭐?"
그는 갑자기 귀를 막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 뭐 드디어 네가 데이트라는 말을 네 입으로 직접 말한 거야? 와. 대단한데? 경윤이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네. 기어이. "
" 오해는 말고. 경윤이 아니니까. 용무 끝났으면 들어가 볼게요. "
" 뭐? 잠시만. 경윤이 아니라고? 아니지. 근데 아까부터 너 오빠한테 이 거슬리는 말투는 뭐야?"
" 뭐가요?"
나도 모르게 그를 흘깃 째려보는 표정으로 올라다 봤다.
정말 순간이었다.
가능한 눈치 빠른 그에게 최대한 내색 않고 간섭당하지 않으려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답변도 최대한 짧게 했었다. 째려보는 건.
" 요것 봐라. 너 딱 들켰어. 전화해. 희경이 한테 오늘 나랑 있고 너 집 앞이고 이야기한다고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어서. "
그렇게 말하고 연우는 나를 운전석에 태우고는 다시 돌아가 보조석에 탔다. 그리고 말했다.
" 대리기사님 조용히 이야기 좀 할 수 있는 곳으로 가 주시죠?"
나는 차에 올라 용인 애버랜드를 찍었다.
" 뭐지? 설마 이 밤에 거기까지 갈 거야?"
" 아니요? 가다 되돌아올 건데요?"
" 근데 왜 거기를 찍어?"
" 왜냐면 최대한 속도를 내야 하거든요. 미친 듯."
" 뭐? 뭐라는 거야?"
" 부앙 나아아 앙"
본의 아니게 운전을 하고 보니 애버랜드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연우는 연신 담배를 달아 핀 후에야 다시 운전석 나를 보더니 후아하고 한숨을 쉬고 그리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고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그리고 껄껄껄 웃더니 내게 다가와, 차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 저기 난폭 대리기사님 좀 내리셔야겠어요. 지금은 운전을 맡기기 힘들 것 같은데요? 제가 얼마 먹지도 않은 술이 확 다 깼는데. 그렇다고 바로 운전을 할 수는 없어서요. 불안해서 운전을 못 맡기겠어서 말이죠. "
나는 차에서 내려 차 앞 보닛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내 옆에 기대 서는
" 내가 데이트 망쳐서 화가 난 거야? 아님 내가 연락을 안 해서 화가 난 거야?"
" 둘 다 아닌데?"
" 그럼 뭐, 뭐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 니 차도 아닌 내 차를 그렇게 미친 듯 카메라는 다 찍히고 응? 나 벌점이 얼마 인줄이나 알아? 너 때문에?"
그건 미쳐 생각을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한테 고지서가 날아오는 게 아니니.
" 그건 미쳐 생각을 못했네. 미안해요. "
" 아휴. 말을 말자. 내가 내 차를 몰아서 생긴 벌점이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아니 그럼 뭐 때문에 그리 미친 듯 달린 거야?"
" 미쳐서"
" 뭐?"
" 미쳐서. 내가 미치겠어서."
" 아니 말을 하라고.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거냐니까?"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간단히 말하면 연우가 그냥 넘어갈까? 그럴 일은 애초에 없겠지? 연우 성격에 없는 시간 쪼개서 아마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면서 말리겠지? 아니 뒷조사를 시킬 수도 있겠다. 음 아니다. 미친 듯 화를 내며 헤어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에라.
" 남자친구 생겼어."
" 아까 말했잖아. 너 데이트 갔다며? 근데 그래. 그게 그렇게 화가 나?"
" 주체가 안돼. 화가."
" 아니 뭐가 그렇게 주체가 안되냐고 도대체. "
" 내 감정이 내가 감당이 안돼."
그러자 그가 껄껄껄 또 그렇게 한바탕 웃었다. 그러더니 내 머리를 막 헝클어 뜨렸다.
" 아 딸 키우기 힘들다. 애를 어쩌냐?"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눈물이 말 그대로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 야. 울지 마. 머 그럼 연애가 사랑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대 물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 쉰 뒤,
"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아휴. 네가 이제야 눈을 떴구나. 사랑에. 미련한 것. 남들을 10대에 20살에 하는 사랑을... 남자친구 군대 보내며 하는 그 미친 사랑을 이제야 하다니 껄껄껄."
" 웃지 마요. 나 나름 심각해. 정말 진지하다고. "
" 그래 많이 진지하세요. 아 귀여운 것. "
내가 연우를 째려보자, 연신 웃으며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며
" 아니 고 짧은 세에 이렇게 너를 미치게 한 놈이 누구야? 어떤 놈인데. 이 오빠가 상담해 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휙 하고 밀어버리고는
" 환자분 상담을 받으시려면 돈을 내셔야죠?"
나는 다시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 응? 이 손이 아니고 상담료."
" 줬잖아요. 여기 온 대리비."
그는 또 한 번 껄껄껄 웃으며 내 손을 공손히 내리고는 한 손으로 포근히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내게 눈을 맞추며,
" 자. 이제 말해봐. 어떻게 만난 사인지. 화 안 낼 테니. "
" 끝까지 화 안 낼 거지?"
연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차 보닛 위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담담히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운명 같던 재우의 만남과 뜨거운 사랑과 헤어진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 그럼 뭐 깔끔히 헤어진 거네. 네가 찬 거잖아? 아주 멋지게 카리스마 있게."
" 내가 이야기 끝날 때까지 다 들어준다며?"
" 응? 그럼 그 나쁜 놈을 다시 만난 거야? 왜? "
나는 그에게 천천히 내가 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유를 들려줘야 했다. 왜냐면 나도 알아야 하니까. 내가 나를 모르는 것 같아서 똑똑히 알려줘야 하니까.
이미소 너 알고 있지?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재우는 나와 옥상에서 그렇게 헤어진 뒤 딱 다시 5일 만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앞에 찾아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 완전히 헤어졌어. 그러니 다시 생각해봐 줘. 너에게 나란 남자 지울지 말지."
순간 도서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고 나는 그를 잡아채서는 옥상으로 향했다.
"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내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하자, 재우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도서관에서 처음 눈을 마주친 날 나에게 빠져들었고 공무원을 준비 중이던 자신에게 여자는 사치처럼 느껴져 그는 나를 잊기 위해 도서관에 오지 않았고 그래도 안돼서 나를 잊기 위해 자신을 쫓아다니던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느 날 내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주체할 수 없어서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내가 관심도 안 보이고 물어도 대답도 않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여자 친구의 얼굴을 보자 내 얼굴이 떠올라 몇 번을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자꾸 집으로 찾아왔었다고 했다. 되려 내게는 연락처를 주고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며 그래서 일이 그 지경이 된 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연우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이 이후의 이야기는 그냥 하지 않았다.
재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그냥 머릿속에 그나마 있던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저 그가 한 말. 너 아니라도 여자가 많다던 그 말이 섬광처럼 지나가며 내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대고 있었다.
' 내가 왜 너를 미치게 만드는지 내가 똑똑히 증명해 줄게. 내가 다른 여자들과 어떻게 다르게 잔인한 사람인지. '
그렇게 재우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재우와 함께 내려가 관계를 하고 바로 근처 슈퍼로 가서 간단한 반찬거리와 간식거리를 사서는 집에 챙겨두고 재우에게 내가 비는 시간을 체크해서 알려 준 뒤 단서를 달았다.
나와 사귄 면 매일 봐야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봐야 하고 네가 그러니까 재우가 내게서 마음이 떠나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만나든 나를 차도 되지만 내가 재우에게서 마음이 떠나면 더 이상 만나지 말고 내가 그를 떠나기 전에 먼저 나를 떠나야 한다고.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재우는 운명 같은 나를 떠날 일이 없으며 자신을 버릴 일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키스를 퍼부으며 그렇게 자신을 좋아하는 내가 재우에게서 마음이 떠났는지 어떻게 자신이 아느냐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아마 네가 딱 보면 알 거야. 내 몸에 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정나미 떨어지리 만큼."
그리고 매일 시간이 빌 때마다 만나고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낮에 그는 도서관에 와서 앉아 있었고 나는 늘 하던 대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도 어떠한 물건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추억할만한 거리조차 남지 않게 철저히 오로지 얼굴만 보았고 그와 격정적인 관계를 하고 다정히 웃어주며 그를 응원했고 살뜰히 도 안부를 물어보고 그를 챙겼다.
그게 오늘까지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우에게 재우와 재회를 한 이유를 섣불리 다 이야기 말할 수는 없었다. 연우라면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나를 마치 들여다보듯 때로는 나를 감싸고 있는 듯 느껴지니까.
" 왜 다시 만났냐니까?"
연우가 물었다.
" 헤어지려고."
" 응? 너 사귄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잖아?"
" 사귄 건 한 달 반정도인데 그를 사랑한 건 132일이고 그와 보낸 시간은 98시간이야. 아직 2시간 모자라."
" 왜?"
" 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니까."
" 이 바보 멍청이야. 너 사람 헤어지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 어이구. 나참."
" 그 시간이면 충분해."
" 응?"
그는 내게 의아한 듯 바라봤다.
" 집에 가시죠. 손님.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만 받을게요. "
" 정말 이대로 간다고?"
" 응"
" 2시간?"
" 응"
" 뭐가?"
" 충분하다니까."
그렇게 조르는 그를 밀어 차에 구겨 넣고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차를 천천히 몰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단속카메라를 확인하고 바닥의 규정속도를 제대로 준수해 가면서 그렇게 꼬박꼬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