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기억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움집과 움막 사이로 넓게 펼쳐진 공터가 한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는 흙투성이 아이들과 노인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젊은이들은 다 어디 있나?"
대왕이 바닥에 엎드린 나이가 가장 많은 연장자에게 말을 건넸다.
" 이들에게 말을 해봐야 우리말을 아마 못 알아들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책사는 말에서 내려 바닥에 작은 아이의 형체를 그리고 X표시를 하고 허리를 구부린 노인의 형체를 그린 뒤 X표시를 하며 연이어 다시 동그라미를 계속 그려댔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순간 주변은 흐느끼기 시작하면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터트린 울음에 온 마을이 울음바다로 바뀌며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노인은 우는 아이의 입을 막고는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책사가 그런 노인의 팔을 일으켜 아이들 내려 놓고 대왕 앞으로 끌고 오자, 곧이어 병사가 4~5명이 말을 몰아 움집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들의 신호에 따라 한 움집에 들어섰고 웅덩이가 쌓여 있던 토기와 철제 농기구를 보며 말에서 내려 그것을 들고는 움집을 나왔다. 그리고 이내 병사들에게 건네자 병사들은 한 걸음에 말에서 내려 받아 들고는 대왕에게 향했다. 내가 말을 타고 대왕에게 갔을 때 책사가,
"이들은 분명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척해도 아마도 말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이런 그릇과 철을 다루는 솜씨로 봐서 보통 솜씨도 아니고... 분명 근처에 젊은 것들이 모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선 여기서 행낭을 풀어 짐을 더 정비를 하고 며칠 머무르면서 군비를 정비하고 이동하시죠. "
대왕은 책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 너와 너네 무리는 나를 따르고 책 사는 마을에서 군비를 정비하고 식량을 챙겨라. 민은 건들지 말고. 최대한 호의를 베풀라. "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이끌고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얼마나 되었지? "
" 달이 두 번 차올랐습니다. "
" 흐음."
긴 대나무에 흰 무명천을 길게 단 제사단 길 끝 제단 장 위에 서 있던 천군은 천신제를 올리다 뒤돌아 우리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 아마 조만간 여기로 말을 탄 용맹한 자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거스르면 안 된다. 이제 시작되었다. 이제껏 알려준 대로 그들이 오면 성대히 맞이하고 최대한 정중히 대접해야 할 것이야. 그들이 요구하는 최대한의 것들을 들어주고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그들이 돌아가면 우리는 가야산으로 간다. 여기 모인 이들은 이 내용을 절대 발설하면 안 될 것이야. "
천군은 그렇게 말하고 무리에게 지시를 내렸고 젊은 여인들은 관가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와 차리기 시작하였고 민의 복으로 환복 한 군인들은 갖은 유리와 수정 등 중국에서 들여온 장신구와 사치품, 금과 은, 비단을 가져와 한 귀퉁이에 정성스레 쌓은 다음, 그 곁에 군량미와 사냥해서 잡아 둔 가축을 쌓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멀리서 말굽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천군은 급히 나를 움막 안으로 불렀다.
" 네 천군. 부르셨사옵니까."
" 미안하다. 이 아비가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아버지는 나를 한번 꼭 끌어안고는
" 하지만 천군으로 사사로이 점괘를 이용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찌하겠느냐. 나 또한 천군이기 이전에 아비인 것을.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기도 한 것을... 내 말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곧 그가 여기 당도할 것이야. 너는 최대한 그와 마주하여서는 안된다. "
" 그가... 누구이옵니까?"
" 네가 보면 알 것이다. 한 눈에도 알아볼 것이니... 아마도 네 연이 닿아 그를 마주하게 되면 그는 너를 알아볼 것이야. 하지만 너는 절대 그와 말을 섞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그들의 손에 이끌려 네가 가게 되면 우리는 멸족을 하고 말 것이야. 하지만 네가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대대 손손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일반 민의 틈에서 명맥을 유지할 것이야. 명심해라.
절대 그들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혹여 사로국(신라)에서 너를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차피 그들 또한 우리와 한 몸. 결국은 이 땅에 뿌리내림은 같으니 내 말을 섭섭히 여기지 말거라. "
" 아바마마...."
" 그리고 네가 어떤 능력을 가진 지도 절대 그들이 알면 안 돼. 알겠느냐. 지금처럼 그저 저들 사이에 섞여 그냥 평범하게 지내야 한다. 절대 그들에게 네 능력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게야. "
그리고 천천히 천군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손짓으로 말했다.
" 아이고. 이 여리고 안타까운 것. 못난 아비를 만나 잘못된 천운을 하필이면 네가 물려받을 줄이야. "
천군은 잠시 흐느끼고는 내게 말했다.
" 아가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렴. 이제 더는 너를 지킬 수 없으니 앞으로 나를 절대 아비로 보아서는 안된다. 네 아비는 이 자리에서 죽었으니 그리 알고..."
천군은 목에 걸었던 옥구슬을 내 목에 걸어주며 한번 쓸어내리고는 이내 어미와 함께 움막 밖으로 나갔고 곧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마병과 도착한 이들.
제일 우두머리인지 선봉에 선 자는 투구를 쓰고 용맹한 품채를 드리운 채 말을 몰아 천군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섰고 그런 그에게 천군이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꺼내 들어 올리자 그것을 받고는 말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무리에게 이르며 무어라 말을 하더니 일제히 그들의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준비된 음식 뒤로 둘러쌓다.
천군의 지시로 민이 고개를 숙이고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자, 그의 병사들도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 언제 움직이면 되지?"
거아하게 술판과 춤판이 벌어져 제법 흥이 오른 축제를 움막 안에서 바라보다 유모를 바라보며 내가 묻자,
" 저들은 매의 눈을 지녔다고 들었사옵니다. 조금의 움직임에도 저들이 알아챌 것이니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하옵니다."
나는 다시 조용히 움막 구석으로 가서 쭈그리 앉아 한참을 다리가 저려 올 때까지 그렇게 새벽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붉은 달이 중천을 지나 어느새 동녘 방향으로 반쯤 떠올랐을 때(새벽 3시경).
곧이어 유모와 함께 온 기마병이 손짓을 하였고 내가 움막 뒤로 나서자 기마병은 포복자세를 손짓하며 내게 따라오라고 신호하였다. 나는 낮은 자세로 한참을 허리를 숙여 그를 따랐고 한 시간을 그렇게 걸어 한참을 벗어난 후에야 세워져 있던 말에 올라 급히 가야산으로 향했다.
이틀을 쉬지 않고 내달려 도착한 가야산 중턱에 위치한 가마터.
그곳에는 궁궐에서 주문한 도기와 무기를 만드는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 천군께서 이르기를 곧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물러간다고 하니 조금만 힘을 내어 주시고 혹여 그들의 무리가 와서 나를 찾아도 절대 발설하시면 아니됩니다. 자칫 수를 잘못 두면 하늘에서 이르기를 우리는 여기서 멸족을 당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하였으니 다들 명심하시옵소서. 이제 저는 여기 계신 분들과 한 몸이오니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든 그저 바라만 보셔야 하옵니다. "
" 예. 마마."
막상 오랜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들이지만 내가 지나가자 나를 한번씩 안아보고 내 손을 잡아보고 그렇게 눈물을 훔쳤다. 그들도 알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진심이 담긴 눈짓으로 서로의 안위를 물었기에 더이상 슬픔을 내색치 않고 눈물을 훔치며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들과 헤어진 나는 조금 더 산으로 올라 나즈막하게 자리 잡은 동굴 옆 폭포수 가 움집으로 들어 섰다.
그가 나를 찾았을 때 나는 손 등에 반딧불이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 우리 말을 알아 들으시지요. 군사는 물렸고 오로지 당신만 나를 따르면 됩니다. 천군이 한 모든 부탁과 조건은 대왕께서 흔쾌히 들어 주셨고 이제 당신만 함께 하면 됩니다."
나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냇가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응시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시 그를 보자 그의 얼굴은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하면 저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따라 나서면 우리는 멸족을 할 운명이고 그렇다고 내가 나서지 않으면 그는 돌아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터인데 흠.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반딧불이 다시 날아 들어 내 시선을 흐트러 트렸고 나는 그런 반딧불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붉게 변한 달.
적어도 돌아간 그는 내가 없어도 죽지는 않을 터. 하지만 저 달기운으로 보면 우리의 연은 내가 끊어야 사는 법. 아니 그가 살 길은 내가 죽어야 하는 법. 그러기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고 지금 생을 마감하기에는 아직 사로국의 이들이 오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사로국 이들이 당도하면 중턱의 일족들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도 지켜야 하는데... 내 곁에 이 사람을 어떻게 발을 묶어 둘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 나를 바라봤고 그런 그를 다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머리위 투구를 벗겼다. 그러자 그가 내 손에 있던 투구를 들어 품에 안은 채. 내 턱을 들어 올렸다.
" 당돌하구나. 내가 두렵지 않느냐? 내가 누군지 알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적어도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발 끝을 들어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 밀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
천천히 그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쓸고는 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가 돌덩이 마냥 온몸을 굳힌 채 멀뚱히 나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 본다.
그러더니 무언가 홀린 듯 스스르 눈을 감았다. 내가 그에게 키스를 하고 눈을 떴을 때 그는 흠칫 놀라 투구를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눈을 뜨고는 이내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떨구고는
" 너는 재물. "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달을 바라 보며 말했다.
" 나를 혹하여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대왕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서 서둘러라."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며 내 손목을 강하게 이끌었고 강하게 버티던 내 발은 그만 미끄러지며 비틀 쓰러지려 했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나를 한팔로 안아 들었다.
" 괜.... 괜..찮느냐?"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보이며 그의 품에 안겨 그를 그윽하게 올려다 보며 그에게 속삭였다.
" 당신의 대왕은 저를 가질 수 없사옵니다. 이는 이미 정해진 운명. "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내 어깨를 큰 손으로 감싸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를 뒤에 둔 채 나는 천천히 어두운 산길 발걸음을 옮기며 냇가로 핀 수선화를 매만졌다.
" 잘 보시지요. 산 아래를. 저 불빛이 보이시 옵니까?"
그가 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바라보았고 산 아래는 희미하게 불빛이 뿔뿔이 흩어져 깜박대며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 아마도 당신들은 매의 눈을 가졌다고 하니 저 불빛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저들은 사로국이들. 제 운명은 이 산을 벗어나 이어지지 않사옵니다. 그게 제게 주어진 천운이지요. 그러니 당신은 저를 저들에게 내어 줄 수도 그렇다고 대왕에게 내어 줄 수도 없사옵니다. "
" 뭐... 뭐라?"
그는 당황하며 내게 물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등을 돌려 그를 응시하였다.
훨칠한 키에 다부진 어깨. 투구를 벗은 그의 용모는 수려했다.
짙고 두툼한 눈썹은 바람을 타고 결을 이루며 사선으로 뻣어 있었고 이마와 굴곡 없이 이어진 콧날은 볼과 깊이를 더해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매서운 눈매를 감추고 있었다.
그 매서운 그늘 아래 달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 날렵한 그의 턱선만큼. 눈매는 매섭게 보였음에도 그의 눈은 촉촉히 우수에 젖어 내게 매료된 마음을 전하기 충분했다. 내가 그에게 한발 다가가자 그는 한발 물러났고 그런 그의 가슴에 손을 뻣어 가만히 가져다 대자, 그는 내 손에 그의 커다란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두근 ... 쿵쾅쿵쾅쿵쾅...."
그의 두근 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끝으로 그 굵은 갑옷을 뚫고 전해지고 있었고 내 손을 움켜 쥔 그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한참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허리에 찬 칼을 쥐었던 파르르 떠리던 손을 뻣어 내 머리를 움켜쥐고는 뜨겁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며 말했다.
" 불과 얼마전 나는 왜관으로 가 적장의 목을 베어 대왕에게 받친 몸. 수많은 목숨을 이 칼로 베어 너하나 지키는 건 일도 아니다. 헌데 왜 너는 내가 너를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그에게서 한발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에게 보이기 싫은 눈물.
" 당신의 마음과 능력은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운명의 굴레에 당신을 지키는 것은 내가 아니고 대왕이고 나를 지키는 것은 당신이 아니옵고 저 이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서 발길을 돌려 사로국이들이 당도하기 전에 여기를 빠져 나가셔야 하옵니.. 흡."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나를 끌어 안아 뜨겁게 포옹을 하며 나무에 기댄 채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등 뒤의 나무를 쓸어 내리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쓸어 내리며 손등으로 그의 감촉을 느꼈다.
그는 내 손등에 얼굴을 부비며 안타까운 눈망울로 바라봤다.
" 서두르셔야 합니다. 곧 날이 밝으면 그들이 중턱까지 다다를 것이옵니다. "
그러자 그가 내 팔목을 잡고는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그러며
" 너를 여기 두고 갈 수는 없다. 우선 여기서 내려가자. 오전이 되면 대왕과 내 병사들도 산아래 당도할 터. 그때까지 잘 버티면 그래도 승산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찰라 같은 순간만은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내 아비가 천군이 그리 말하였음에도 나는 마음은 그를 따라 가고 싶었다. 분명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그와의 입맞춤으로 보았음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저 그 짧은 찰라의 순간을 간직하고자 마음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