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순간
" 엄마는요? 갔어요?"
" 아 아냐. 잠깐... 누구 만나러 갔어. 친구."
만약에 이 순간 내가 혼자였다면 나는 아마도 정신머리를 잃고 모든 상황 판단을 미룬 채 미친 듯 연수를 찾아 이 넓은 서울 바닥을 헤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품에 안겨 두리번거리는 정영.
불안한 듯 보여야 하는 정영은 너무나 태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내 품에서 내리더니 다시 신호가 바뀌자 길을 건너가려 나를 당겼다. 손은 세종대왕 동상을 가리키며.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정영의 손에 이끌려 건널목을 건넜고 그렇게 세종대왕 상 앞에 가서 한참을 구경을 하고 둘러보며 좋아하는 정영의 사진을 찍고 둘이 또 사진을 찍고 다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서 정영에게 주었다.
정영이 골라준 아이스크림을 내가 들고 멍하니 있자,
" 아빠. 아버지! 다 녹아요! 아이스크림이 사라져요!"
사라진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보니 어느새 아이스크림이 내 손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고 그런 내 손을 정영은 열심히 붙잡고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다. 웃으며.
' 이 상황을 정영에게 무어라 설명하지?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 경복궁에 가면 나도 TV 나오는 사람들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
정영이 내게 물었고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 아 오늘은 주말이라 아마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없을지 몰라. 대신에 가면 예전에 임금님이 계셨던 곳도 보고 공부하고 산책하던 곳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
" 와 신기하다. 어서 가봐요. 나도 책에 나오는 곳에 가보고 싶어요."
" 그래. "
어쩌면 이 순간 이토록 천진 난만하게 태연한 정영이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그런 정영의 손을 붙잡고 나는 경복궁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최대한 침착하게 사진을 찍고 설명을 했다.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정영이 내부를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높이 쌓아 올린 담벼락을 따라 열린 궁궐 문을 바라보며 섬세한 그 기와 선을 손으로 만져 보고 그것마저도 신기해했다.
참 여느 아이와 다른 정영. 보고 느끼는 것 자체에 많은 호기심도 있었지만 관심을 가지는 것 또한 남달랐다. 근정전을 둘러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경회루를 지나 교태전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처마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정영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고 어느새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비 올 거 같아요. 아빠 그렇죠?"
" 아 그렇네. 어떻게 하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 나 배고파요. "
" 그래. 그럼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좀 사 먹자. "
서둘러 북촌 한옥마을로 향한 우리는 브런치 카페에 들러 블루베리가 향긋하게 올려진 생크림 수플레 펜케이크를 시켜 먹었다. 내가 열심히 잘라서 정영을 먹이기만 하고 제대로 먹지 않자, 기어이 정영이
" 아~ 아빠 아~"
하며 생크림을 듬뿍 얹어 내게 한입 벌리게 하고는 온통 바닥에 생크림을 떨어뜨린 채 내 입에 팬케이크 한 조각을 밀어 넣었다.
그러며 내가 잘라 놓은 펜케이크를 한입 입에 넣으며
" 으음~~ 맛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아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응? 걱정은 무슨? 내가 뭘.."
그렇게 말하며 천연덕스러운 척 한 입 펜케이크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정영이
" 엄마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영을 바라보자 아무렇지 않게 펜케이크를 입에 다시 한입 넣고 오물거리며 옆에 있던 블루베리요구르트를 한입 주욱 마시더니
" 엄마는 집에 가 있으면 올 거예요.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먼저 집에 가 있는 다고. 아빠랑 마저 구경하고 오라고."
" 엄마가? 언제?"
나도 모르게 포크를 들고 정영을 바라보며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 아까 우리 경복궁에 있을 때."
" 엄마가 전화했었어?"
라고 내가 묻자 정영이 머리를 툭툭 치며
" 엄마 마음이 여기에 들려요. 헤헤."
이제껏 살아오며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것인가.
내 아들이 어떤 아인지.
그녀와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녀와 정영 둘이 별 대화가 없어서 나는 마냥 그녀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불안한 마음에 그저 언제나 정영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으려 한다고만 생각해 왔었다.
정영이 커 갈수록 어릴 때와 달리 살갑지도 않았고 항상 안아주기보다는 조금 떨어진 채 나와 정영을 바라보기만 해 왔기에 그녀의 세계에 정영을 끌어들이지 않으려 그녀 나름대로 정영을 분리하려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마치 불문율처럼 그녀의 그런 살갑지 못한 행동에도 나는 아무 내색 않고 더 신경 써 정영을 챙기고 더 살갑게 안아주려 애를 썼고 그렇게 하면서 자연히 그녀가 더 공부에 집중하고 그쪽 세상의 이야기에 신경을 덜 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그녀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쓴다면 적어도 그녀가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녀도 평범한 인간이 꿈꾸는 바람이나 이루고 싶은 꿈에 도전을 하며 그렇게 인간다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해가 보이며 비가 그치고 있었고 배부르게 배를 채운 정영은 나가자며 나를 보챘다. 그런 정영을 데리고 북촌 한옥마을을 따라 구경을 마저 하고 근처 고궁박물관에 들러 마저 구경을 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정신을 차리고 좋아하는 정영을 생각하고자 애를 썼다.
이리저리 정영이 가자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이끌려 돌아다니다 어느새 지쳐 잠시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어디를 갈지 계획을 세웠던 엊그제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려 애를 썼지만 막상 머릿속에는 텅 비어버린 상태.
내 귓가에는 계속 정영이 말한 집.... 우리 집... 집에 가면 연수가 있다는 그 말만 계속되네이고 있었다.
" 정영아. 아빠 피곤한데 이제 그만 집으로 갈까?"
" 아직 다 못 봤어요. 우리 국립 박물관에도 가야 하고 코엑스도 간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 화가 나서 그만
" 그.. 그건 다음에. 정영아. 집에 가면 엄마가 기다리잖아. 어서 가자. "
" 아직 엄마는 집에도 안 갔을 텐데?"
도대체 이 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가.
그렇게 버티는 정영을 끌어안고 나는 기어이 기차에 올라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헐레벌떡 집으로 향해 현관에 들어서자 보이는 그녀의 신발.
"휴우~ 나 왔어. 자기."
나도 모르게 나온 안도의 한숨.
" 자기?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어느새 천연덕스럽게 연수가 다가와 정영에게 팔을 벌렸고 정영은 언제 그랬냐듯 쪼르르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기고는 한옥마을에 가서 샀던 기념품을 꺼내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겨우 한숨을 돌리고 소파에 늘어졌다.
" 어서 씻어요. 밥 먹게."
소파에 누워 손을 머리에 올린 채 생각에 잠기려 할 때 문득 연수가 말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에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 언제 준비한 거야?"
" 돌아오면 시장할까 봐. 어서 씻고 와요. 정영이는 벌써 자리 앉았는데 어른 답지 못하게."
나도 모르게 흘기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저녁을 먹고 언제나처럼 정영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다시 받아쓰기를 시키고 내친김에 일기를 쓰는 요령까지 가르치고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정영을 붙잡고 들들 볶다가 졸린다는 정영의 말에 정영을 데리고 나와 양치를 시키고 다시 정영의 방에 돌아가 잠을 재우고 나오자 어느새 연수는 잠이 들어 있었다.
'깨워서 이야기해볼까?'
막상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려고 하니 당황스럽던 그 아침의 일들이 물밀듯 기억의 저편에서 밀려왔다.
나를 향해 걸어오던 그. 뜨겁게 키스하던 두 사람. 그리고 감쪽 같이 사라져 버린 그들.
분명 대왕이었다.
세월이 지나 숱한 시간이 흘러도 또렷이 기억하는 나의 왕. 내가 모시던 나의 군주.
그는 몇 겹의 세월을 건너 그렇게 우리에게 왔고 아무렇지 않게 나와 연수에게 다가와 나와 정영이 나란히 서 있는 서울 하늘아래 훤한 대낮에 연수를 품에 안은 채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도 그들이 사라져도 인기척도 못 느끼고 눈에도 못 보는 현실이 더 당황스럽지만 그것보다 더 황당한 건 이런 현실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내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이고 어찌 보면 그들은 버젓이 불륜남녀가 되고 내 아내가 당사자이며 내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인데.
'하아~'
사실 그의 말에 따르면
" 너를 찾아 몇 겹의 생을 돌아왔다. "
는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애초에 그에게 갈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그녀를 그에게 데려다주지도 못했고 그녀가 나 대신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둘의 운명을 갈라놓은 걸림돌이기도 했다.
애당초 그녀가 천녀였기에 천녀였다면 이러한 상황이 한눈에 보였을 터인데 왜 그녀는 내게 왔을까.
왜 그녀는 그때 그에게 가지 않고 나를 찾았고 내게 와서 나를 유혹하고 다시 태어나 나를 찾아와 내게 정영을 선물하고 또다시 이런 시련을 안겨주었던 것일까.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하고 어떻게 판단해야 하며 그녀가 나와 살아오며 보여준 순간들의 그 모습들 중에 어느 것을 진심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불현듯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 산파!
" 고작 남자하나 살리려는 욕망에 지 새끼 구하려는 욕심에 눈이 가려 보이지 않을 테지. "
그럼 그가 했던 남자 하나 살리려는 그 욕망이 내가 아니고 그였었나?
그래서 그 몇 겹의 세월을 그녀는 그렇게 힘들게 버티며 살아온 것인가. 도대체 나는 어디에 그녀의 생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파고들수록 생각이 꼬리를 물면 물수록 더 미칠 것만 같은 이 마음.
질투.
분노.
배신감.
좌절감.
절망감.
희망을 잃은 기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 오늘 나 야근이라 당신이 정영이 데리러 가야 할 것 같아. 연차 냈더니 일이 밀렸네. "
연수의 전화에 나는 서둘러 정영을 데리러 갔다. 다행히 아직 한 명 더 정영과 유치원에 남아 있었고 나는 정영을 태우고 놀이터로 가서 그네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영은 시소를 타고 놀이터 여기저기를 그렇게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한 참을 놀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질 때쯤 아이들이 부모들 손에 이끌려 하나둘 사라지고서야 내 곁에 다시 돌아왔다.
" 이제는 진짜 더는 할 게 없어. 아빠. 들어가요."
가끔은 정영이 무슨 생각하는지 정말 의문이 들 때도 있었고 그런 정영이 나름은 대견한 생각이 들어서 너무 의젓해 보이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와락 껴안아 주었지만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그저 정영이 내민 손을 잡은 채 집으로 향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분식집에 들러 간단히 김밥에 우동을 시켜서 먹었다.
" 아빠~ 아빠~"
정영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정영이 내게 김밥을 내밀었다.
" 자 ~ 아~"
왈칵 쏟아지는 눈물. 왜... 눈물이 나는 거지?
" 아빠 이런 걸로 감동받으면 안돼요. 정영이 돈 많이 벌면 더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요. 자 아~"
도대체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든 것일까?
나는 눈물을 훔치며 정영이 건넨 김밥을 한입 먹고는 우동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그러자 내 입으로 면이 쏙 딸려 들어왔고 그런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정영이 방긋 웃으며
" 나도 해볼래요. 우동 "
그러며 정영 앞에 놓였던 작은 국그릇을 내밀었다. 나는 그 그릇에 정영이 먹을 정도로 조금 면을 덜어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당연히 먼저 덜어서 식혀서 정영이 먹을 수 있도록 포크도 준비해 줬겠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내가 정신이 없었나 보다. 그 작은 고사리 같은 입으로 내가 한 듯 면을 한 줄기 후룩 입에 물어 흉내를 내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 아빠가 봐도 재밌죠?"
나도 모르게 정영을 보고 웃고 있었구나. 참 많은 것을 정영은 내게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왜 오늘따라 연수가 없는 집은 이토록 텅 비게 느껴질까.
고작 그녀가 야근을 한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저 잠시 늦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내게 그녀가 없는 집은 텅 비고 공허하고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머릿속에 밀려드는 상념을 없애려 나는 더 분주히 집을 청소를 하고 정영에게 숙제를 내어주고 다시 검사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밀렸던 아침 설거지를 하고 안방에 이불도 정리하고 내친김에 방바닥까지 걸레질을 하고 그러고도 속이 안 풀려서 안 하던 거실 장 먼지까지 닦고 공부를 끝낸 정영을 데리고 화장실로 가서 씻기고 정영에게 잠옷을 입게 한 뒤에 화장실 타일까지 닦았다.
군대를 제대한 이후 연수와 살고 나서는 한 번도 하지 않은 화장실 청소.
변기가 광이 날 만큼 반짝반짝하게 밀고 거품으로 연신 욕조까지 다 닦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시원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오자 어느새 정영이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다 잠들어 있었다.
나는 정영을 안아서 방에 눕히고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거의 11시.
아직도 그녀는 집에 오지 않았다.
결국에는 옷을 입고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살피고 최대한 천천히 아파트 입구까지 걸어 나갔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벤츠. 그 앞에 서 있는 연수. 맞은편에 그.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살기가 느껴졌다.
' 저 자식을 죽여버릴까. 아무도 모르게 뒤쫓아가서?'
내 가정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렇게 힘들게 자신의 생을 걸고 내게 온 연수를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며 나름의 취미를 찾아가며 인간으로의 삶을 지탱하려 애쓰는 그녀 앞에 불현듯 나타나 온 가정을 뒤흔드는 그를.
미치도록 원망스럽고 미치도록 저주스러운 그를 없애 버릴까.
" 당신 왜 나왔어? 전화라도 하지. "
나를 보는 연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 이번 생은 내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해. 다시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억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이내 차에 올라 멀리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