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랑했던 사람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게 나인 줄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왔을 때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함께 정영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힘든 과정 속에서 그녀와 함께 숱한 시간을 버티며 보낸 그 시간 동안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이 나이고 오로지 그녀에게는 나밖에 없다고.
그래서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었고 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그녀뿐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소중했고 하루하루 즐거웠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그녀와 함께 하길 원했다. 삶의 원동력이자 살아가는 순간순간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운명이고 내가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하늘에서 주어진 업보라 여겨 내 몸속을 파고드는 어떠한 고통도 감내했다.
정영을 잃은 줄 만 알았던 순간도 그녀가 사라졌던 순간도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나는 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내가 눈으로 보고 느끼는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때로는 내가 미칠 듯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더 있기도 했다.
내 눈을 뒤집히게 만드는 고통.
확인하려 들 수도 없고 확인해서도 안 되는 고통.
들추려 들면 들수록 더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
그래서 애써 외면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아닌 척 괜찮은 척해야만 하는 것들.
그저 내가 믿고 보고 같이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알고 믿어야 하는 것들.
서울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영은 무럭무럭 자라나 어린이 집에 다니다 어느새 유치원에 들어갔고 나도 나름 소방서가 커지며 이동을 하여 진급도 하였고 그 사이 우석도 결혼하여 애기도 생겼고 그것도 둘씩이나 말이다.
연수도 어느새 정영이 자라는 동안 서울에서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밤에 사라지는 일이 더는 없었다.
아마도 그녀에게 그런 일이 없어진 것이 나는 정영이 내게 와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생기며 그녀에게 주어진 업보가 사라져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왔었다.
연수는 정영이 잠든 밤이면 야간에 공부를 했고 어느새 저녁이면 수업을 들으러 다니다 자격증을 따고는 다시 편입을 하고 다시 자격증을 따고 그렇게 공부를 하다 취업을 했다. 정영이 유치원에 들어가고 얼마 뒤 연수도 취업을 하며 아침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게 되었다.
내가 비번인 날은 내가 정영을 데려다주고 잠이 들었고 아니면 연수가 아침 일찍 유치원 앞에 정영을 바래다주고 울며 불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정영을 문도 채 열지 않은 곳에 두고 출근하기 바빴다. 몇 번을 그렇게 한 후에야 그곳에서 어느새 익숙하게 울음을 그치고 선생님이 출근하길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등원하여 꿋꿋하게 수업을 듣고 제일 마지막에 연수가 데리러 오면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나오는 정영.
가끔 내가 데리러 가면 그렇게 즐거워하며 신이 나서는 놀이터며 근처 마트에서 먹을 거를 사서는 한아름 안아 들고 좋아하는 정영을 안아 들어 집으로 들어서면 금방 집에 들어온 연수가 식사를 분주히 준비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 아니 양말이며 옷이며 좀 벗으면 제자리 말고 분리 좀 해서 빨래통에 넣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왜 둘 다 말을 안 들어. 매번 이렇게 두 번씩 일을 시킬 거야?"
" 아들~ 엄마 화내시잖니. 그런 건 아빠 따라 하면 안 된다. 알았지?"
그러면 정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 네. 아빠. 조심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내 품에서 벗어나 엄마에게 달려가서는 연수를 뒤에서 꼭 안아주며
" 엄마~ 오늘은 누가 구박한 거야? 이 정영이 혼내줄게요."
" 아냐. 그런 거. 엄마가 일이 서툴러서 그래. 많이 긴장해서 그러니 엄마 신경 안 쓰이게 정영이 집안일 두 번 손 안 가게 해줘야 해. 알았지?"
" 네!"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정영의 방으로 가서는 꺼내놓은 책들을 정리하고는 했다. 어떤 때 보면 말하지 않아도 의젓하게 어른인 듯 행동하는 정영이 더 어른처럼 느껴져 새삼 나도 모르게 배우게 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영을 앉혀두고 한글 수업을 하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제법 배워서 잘하기도 하지만 내년에 학교에 가려면 기본적인 문장을 쓰고 이해하고 할 줄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동화책을 더는 읽어줄 수 없어서 스스로 읽을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제법 어려운 문장도 써가면서 가르치려다 보니 매번 정영은 30분도 채 안돼서 도망가려들기 바빴다.
" 정영아. 그럼 더는 책 안 사줄 거야. "
매번 내가 책으로 협박을 해대면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를 들고 나오던 연수가 내 앞에 빨래를 내려놓으며
" 정영아. 너 엄마랑 그럼 나머지 공부하러 갈까?"
그렇게 연수가 매섭게 노려보며 이야기했고 그럴 때면 정영은
" 아니! 아뇨. 아빠랑 마저 할게요. "
그러며 다시 방으로 쏙 튀어 들어갔다.
그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연수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럴 때 보면 연수는 천연덕스럽게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씩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책을 펴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정영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빨래를 널고 오면 어느새 연수가 정영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 다시 내게 보내고 내가 정영을 방에서 재우면 하루는 어느새 진정이 되면서 우리의 일과도 마무리가 되었다.
" 휴우~ 잠들었어."
" 고생했어. 남편."
내게 다가와 볼에 입을 맞추는 연수.
이렇게 다정한 연수의 품에서 잠들기보다는 정영이는 내 품에서 잠드는 걸 더 좋아하고 금세 잠이 들어버리니 어쩔 수 없이 매번 정영을 재우는 일은 내 몫이 되어 어느 때는 정영을 재우다 곁에서 잠들기를 여러 번. 연수를 품에 안은 게 언제인가 싶을 때도 보면 연수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어서 차마 곁에 파고들기도 미안했다.
그래도 나도 남자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어서 그렇게 참다 참다 연수에게 가면 연수는 마치 주어진 일을 하듯 그렇게 거사를 치르고 나는 폭발한 욕구에 피곤에 이내 지쳐 잠들어 버렸다. 문득문득 잠에서 깨어 보면 그 순간도 연수는 공부 중이었다. 그럴 때면 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일쑤.
" 당신 이제 취직도 했는데 공부 그만하면 안 되나?"
호수를 산책하며 연수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연수가 내 팔짱을 끼고 있다 갑자기 멈춰 서며,
" 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
" 그게 뭔데?"
" 말을 할 수는 없는데... 뭐 아무튼 공부를 하면 살아있는 기분이 느껴져서 좋아. 지금은 유일한 취미이기도 하고. "
" 시험을 준비하는 거야?"
" 그런 건 아냐. 단지 내 만족이니까. "
그 순간 앞에서 열심히 비눗방울을 날리던 정영이 달려와 우리 품에 안겼고 그런 정영을 보자 정영이 울고 있었다.
" 정영아. 왜 그래?"
" 아빠 나도 동생이 갖고 싶어요. "
그렇게 말하며 물끄러미 앞에 가던 아이들을 가리켰다. 그런 정영을 보고는 내가 연수를 바라보자 연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바쁘게 집으로 돌아와서 익숙하게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잠이 들려고 할 때 내가 연수를 품에 안자 연수가 내 팔을 풀어서는 등을 돌리며 떨어져 누었다.
" 당신 애정이 식었어. 예전 같지 않아. "
내가 연수에게 다가가 더 품에 안고 말하자
" 나 피곤해. 어서 자요. "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연수는 잠이 들어 버렸다.
섭섭한 마음도 잠시 다시 잠든 연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나도 바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피곤하게 일상을 버티는 줄 알기에 그런 고생을 시키는 게 나 때문인 것만 같고 한낯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란 인간을 남편으로 맞은 연수가 선택한 운명이기에 더 그런 그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눈 떠 있는 동안 나와 함께하는 동안은 최대한 그녀에게 행복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영아. 우리 놀이동산 갈래?"
모처럼 연휴에 월차까지 하루 더해서 큰 마음을 먹고 서울로 향했다. KTX를 타고 청량리 역에서 내려 다시 용인으로 향했다.
정영은 신이 나서 난리였다.
달리는 기차에서 과자며 음료수를 사 먹고 창밖을 바라보며 잔뜩 흥분을 한 채 한참을 떠들더니 이내 골아떨어졌고 조금 있다 청량리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내가 안고 환승을 해서 이동을 했고 다시 용인행 기차에 올랐을 때는 어느새 깨어 어서 가자고 난리였다.
그렇게 애버랜드에 가 동물원에 먼저 가서 정영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코끼리부터 사자, 호랑이, 기린, 긴 꼬리 원숭이까지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오후 2시.
새벽부터 움직인 터라 허기지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보내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때 연수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준비한 김밥을 꺼내서는 돗자리 위에 펼쳐놓았다. 예쁘게 방울토마토랑 사과까지 같이 옆에 세팅을 해서 차려온 도시락은 너무나 정성이 가득했다.
" 잠도 안 자고 준비하더니 진짜 고생했네. 사 먹어도 되는데."
" 맨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이런 때 솜씨 발휘 해야지. 자 아~"
연수는 '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정영을 두고 내 입에 한입 먼저 넣었고 정영이 금세 토라져 연수를 째려봤다.
" 엄마! 미워!"
" 뭘 미워! 아빠가 고생은 다하는데! 쪼끄만 게 어른 먼저 챙겨야지! 자 너도 아!"
" 싫어!"
" 그럼 먹지 마! 어디서 버릇없이!"
" 왜들 그래. 좋은 날. 자 둘 다 아 해봐. 아~"
그렇게 둘 다 입을 벌리게 하고 내가 양손에 김밥을 든 채 넣어주자 서로 팔짱을 낀 채 째려보며 입을 벌렸고 내가 둘의 입에 넣어주자 어느새 방긋 웃으며 신이 나했다.
따스한 5월의 햇살을 피해 앉은 나무 그늘.
붐비는 사람들 틈에 그렇게 둘러보는 주변의 풍경은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 곳. 발 디딜 틈 없는 이곳에는 어디를 가도 웃음소리에 애들 소리에 정신이 없어도 좋다. 다행히 오늘이 금요일이라 그나마 사람이 조금은 덜한 편이라지만 연휴를 앞두긴 한 듯 구름 같은 인파에 우리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참을 줄을 서서 정영이에게 목마도 태워주고 범퍼카도 탔다. 하지만 다른 놀이기구는 아직 정영이 너무 어려 키가 안돼서 더 탈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정영을 달래서 옆에 있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구경하고 그렇게 한참을 놀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다시 서울역으로 향했다. 정영이 세종대왕을 보고 싶다고 해서 때마침 세종대왕 동상도 구경하고 그 주변도 둘러본 뒤 서울역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아둬서 거기서 동대문도 구경하고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은 경복궁에도 갈 참이었다.
붐비는 서울역에서 내려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계단을 올라 광화문 광장으로 가려고 올라왔을 때 드넓게 펼쳐진 길 위로 시위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녁인데도 인파가 끝이 없이 이어져 있었다.
" 아 데모하는 가보네. 어떻게 하지?"
" 일단 남산으로 가자. "
우리는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남산 입구에 내려 케이블카를 탔다. 아름다운 야경이 수놓은 서울의 밤은 눈이 부셨다. 남산 타워에 도착하자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정영은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우와'
하며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그런 정영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그렇게 야경을 구경했다. 모처럼 느끼는 여유.
사실 난 연수에게 서울에서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숱하게 드나든 이곳에서 서울이 가진 이미지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서울이란 곳이 아름다운 곳이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과 삶의 터전이며 밤낮으로 살아 숨 쉬는 멋진 곳이란 생각이 들게끔. 그렇게 생각들게 해주고 싶었다.
언제나 인간들의 뒤치닥 거리에 바쁘게 지내온 연수 입장에서 보면 탐욕과 권력, 정점의 그곳일지 모르지만 들여다보면 서울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꿈을 이루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자신의 미래를 이뤄가는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인간의 삶이란 사실을... 나는 그냥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늘의 큰 그림에서 보면 어쩌면 하찮게 보일지 모르는 것들이지만 하지만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은 수없이 많고 다양하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톱니바퀴처럼 이어져 거대한 도시를 이뤄 굴러가며 또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우리의 삶을 이뤄 긴 세월 이어지고 있으리라.
남산에서 내려와 다시 택시를 타고 우리는 동대문으로 향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동대문은 불빛이 환하게 밝았다. 문을 닫은 가게도 더러 있었지만 여전히 붐비고 정신없는 곳들. 불야성을 이루는 그곳에서 연수는 출퇴근하며 입을 옷을 골랐고 나는 정영이 입을 옷을 골라서 계산을 했다. 어느새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턱에 정영은 계절마다 옷이 맞지 않았고 그런 정영을 생각해서 꽤나 넉넉한 크기로 옷을 골라서 샀다.
평소에 쇼핑이며 물건을 고르는 것을 싫어하는 연수다 보니 꼼꼼하게 비교하고 챙기는 것은 항상 내 몫이었고 그래서 내가 고른 것은 정영이 언제나 잘 입고 다녔다. 오늘도 정영은 내가 골라 준 옷이 마음에 드는지 바로 입고 가겠다고 때를 썼다.
" 아직 이거 입을 계절이 아니래도."
옆에서 연수가 자꾸 못 입게 하는데도 한여름 바지를 굳이 입겠다고 정영이 때를 썼고 결국에는 옷을 갈아입히고서야 겨우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쳐서 다시 숙소로 들어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아침에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치는 정영 때문에 잠에서 깨자마자 조식을 먹으러 구내 뷔페로 향해 모닝 빵과 간단히 조식을 해결하고 나와 또다시 밀려드는 졸음에 나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정영이
" 아빠~~ 어서 가자~~. 궁궐 궁궐로 가서 보자. 세종대왕~"
" 아 정영아. 세종대왕은 궁궐에 있는 게 아니고 광화문 광장 가는 길에 계셔. "
" 아무튼 가자. 어서 가자. "
마치 문어처럼 늘어졌던 내 몸도 정영의 보챔에 결국에는 더는 못 버티고 벌떡 일어나 정영을 둘러업고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하고 나오자 어느새 먼저 일어난 연수가 화장까지 마치고 곱게 옷을 갈아입고 앉아 있었다.
" 와 당신 체력 정말 대단하다!"
" 후훗. 그래도 내가 좀 더 신체나이가 어리잖아?"
'아 그렇지. 내가 신체 나이는 좀 많지. 그걸 깜박했네.'
순간 무언지 모르지만 억울한 마음이 울컥 솟아났지만 그래. 인정할 건 하자는 마음에
" 머 그래. 그럼 당신이 오늘은 정영을 좀 챙겨봐. 나는 늙어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며 정영을 연수의 품에 안겨주자 바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 다 큰 애를 왜 안고 다니고 그래. 버릇 없어지게. 너도 걸어 다녀. "
그렇게 말하고는 쌩하니 먼저 나가버렸다.
" 칫. 이리 와. 우리 정영이 아빠가 안아주지. "
이내 토라졌던 정영이 내게 달려와 와락 안겼고 나는 그런 정영을 안아서는 연수를 바로 따라나섰다.
오전 10시.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교차로에 신호가 들어오자 분주히 사람들이 건너기 바빴고 나도 길을 건너려는데 연수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는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안 가고 뭐 해?"
아무 말이 없는 연수를 바라보다 연수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놀라 연수가 바라보는 곳을 보자 차가 멈추더니 서둘러 한 남자가 내려서는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정확히 연수를 보며.
그가 다가오자 나도 그를 알아봤다.
내가 아는 사람.
세월이 지나도 뚜렷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그 숱한 날들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도 그의 얼굴형과 매서운 눈매와 부리한 눈은 변하지 않았을까. 20대 중 후반의 건장한 청년.
하늘을 향해 치켜뜬 눈썹과 깊고 뚜렷한 속눈썹.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훨칠한 키. 딱 벌어진 어깨. 성큼성큼 다가오는 거만한 발걸음. 한치의 흔들림 없는 저 도도한 눈동자.
한 팔에 정영을 안아 든 나는 순간 얼음처럼 굳었다.
'설마 환생한 것인가...?'
내가 그를 알아보고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성큼 연수에게 다가온 그는 연수를 한 팔로 감싸 안아 든 채 그렇게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내가 보는데!
내가 서 있는데! 바로 곁에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당당히 말했다.
" 너를 찾아 몇 겹의 생을 돌아왔다. "
내가 너무 놀라 정영의 눈을 가리고 다시 연수를 바라봤을 때 놀랍게도 연수와 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연기처럼.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나는
그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하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