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판의 주인공

무대의 서막

by moonrightsea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 겨우 비집고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옆으로 바짝 붙어서 나는 더 벽으로 붙었고 내 귀에 대고 누군가 말을 걸었다.

" 굿모닝"

곁눈질로 보니 한팀장.

나는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11층이 되어 내리는데 한 팀장이 내 팔을 이끌어 비상구로 향했다.

" 뭐 하는 짓이에요. 출근하는데."


" 아니 난 어제 그렇게 가버려서 괜한 오해 하시지 말라는 말하려고요."

" 아니 그럼 오해 안 하게 행동 좀 하시죠."


" 안 그래도 사람말 좀 다 듣고 가시죠. 어제 제가 결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저와 동갑이라 편하게 지내자는 말을 하려던 것뿐인데 너무 의외의 반응을 하셔서..."


나는 순간 머리가 멍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아.. 맞다. 내가 잔뜩 날을 세우고 그에게 쏘아붙였지.


" 갑자기 그렇게 잡으니 저도 너무 놀라 그렇게 반응한 거고 팀장님도 이상한 말을 하시니 제가 그렇게 답한 것뿐이죠. "

" 풉"


그의 반응에 나는 황당한 생각이 들어 그를 빤히 바라봤고 그런 나를 보던 그는 이내 손사래를 치며,

" 오해했다면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 저는 그냥 제가 그쪽 회사를 어쩌다 보니... 그쪽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본의 아니게. 저희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는 석사 이 상급인데 연봉과 학력으로 매칭하다 보니 조건이 다들 안 맞고 맞는 사람들은 이직을 희망하거나 더 높은 퇴직금을 요구해서 뭐 그렇게 된 거라... 아무튼 본의 아니게 오해하게 만들어 죄송하네요. "


그러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 정식으로 인사하죠. 우리 동갑이고 뭐. 같은 부서니 이제 편하게 사석에서는 친구로 지내요."

" 전 친구 필요 없어요.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며칠 째 눈치만 보는 한팀장 덕분에 주변에서 숙덕대는 여직원들 덕분에 결국에는 회사 사내식을 먹다 기어이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 그 친구 하자는 말 아직도 유효해요?"

그러자 밥을 먹던 그가 크흡 하고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 당연하지. 내가 여자들이랑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너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서."

" 잘 되었네. 난 유부녀니 괜한 오해도 안 받을 테고. 뭐 고민 있거나 관심 있는 여직원 있음 말해봐. 다리 놓아줄게. "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곁에 앉아 식사를 마쳤고 둘은 자연스레 1층 로비로 내려가 커피를 사서는 옥상 벤치로 향했다.


" 그렇게 주변이 신경 쓰인 사람이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피한 거야?"

한팀장이 내게 물었다.


" 이제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당신 때문에 신경 쓰게 생겼거든. 그래서 이참에 당신을 방패 삼아 좀 숨어 보려고."


" 내가 방패가 된다고? 어떻게?"

" 음... 그건 내게 온 관심을 네게 돌리는 걸로?"

그렇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는 여직원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들은 못 본 척하며 커피를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 보이지? 앞으로 저들은 내게 와서 네 근황과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 끊임없이 물을 거야. 그럼 난 그때마다 네게 바로 보낼 거야. "

" 푸훕"




그는 먹던 커피를 뿜었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뭐 하자는 거지?"

" 뭐를? 네가 그만큼 부담스러운 존재란 사실을 알리는 거지. "


그러며 나는 내 커피를 쭉 들이마셨다.

" 유부녀가 괜히 유부녀인 줄 알아? 적어도 내가 유부녀라고 사내에 소문이 돌면 적어도 너랑은 엮일 일이 안 생길 거란 말이야. "

그러자 그가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 과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커피를 쭉 들이켰다.

" 그렇게 내가 안 둘 테니까. 앞으로 각오해. 네 취향. 네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 다 읊어봐. 내가 너 귀찮아서라도 떼어 버릴 테니까. 나보다 100배는 더 탐나는 여직원으로 "


그러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 크하하하하"

"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았어?"


" 역시 유부녀는 다르네. 밀당이 없어. 그래서 매력적이야. "

" 괜한 말로 돌리지 말고 네 밀당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대표지?"


" 아닌데? "

" 아니라고? 맞는 거 같은데..."


" 음 대표는 아닌데 대표급이지. 지금은 여기 없지만. 곧 복귀하겠지. "

" 누군지 궁금하네. 네 마음을 훔친 그녀가."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한 그는

" 흠. 난 그냥 평범한 여자들에게는 관심 없어. 야망을 가진 여자에게나 관심 있지. 더구나 저돌적이면 더 좋고."

" 변태 취향이구나. 하나 접수."

" 뭐야. 나 변태 아닌데."


" 알았어. 발뺌도 접수."

" 아 아니래도..."


그렇게 우리는 짧은 점심시간 동안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급속히 친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점심시간이면 둘이 같이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며 어느새 사내에 이름난 오피스 와이프가 되어 있었다.


대학원에서 기말고사가 있는 기간. 나는 다른 수업은 리포터로 대체하고 마지막 수업은 연차를 쓰고 시험에 참여하였다. 답답한 회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한 팀잠과 친해지고 본의 아니게 나를 별일 아닌 일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에 그들의 관심은 한팀장이 관심가지는 여직원이나 한팀장의 개인적 취향이나 그의 집안에 대한 질문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라고는 없기에 이내 그들도 실망을 하고 돌아가기 일쑤였고 덕분에 나는 그와 별 사이 아닌 사람이 자연스레 증명은 되었지만 나는 나름 이것조차 불필요한 내 세계에서 지나친 관심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집에서 4시간씩 자는 쪽잠도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모처럼 마지막 시험을 치고 집에서 늘어지게 잠을 청할 요량으로 내일이면 토요일이기도 하니 모처럼 요령을 부려 오후 시험임에도 오전부터 연차를 써서 그렇게 늘어지게 잠을 청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시험을 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오며,


" 와 끝났다."

라고 두 손을 하늘로 뻣으며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며 섰는데,


" 그럼 오늘은 나랑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군. "


태호가 앞에서 나를 보며 말했다.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은 적어도 계산에 없던 순간.


아직 플랜 B 구상도 못했는데.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아침에 자다 일어나 그대로 나온 슬리퍼에 운동복에 스냅백에... 뭔가 당당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내 비주얼. 이대로 또 끌려가야 하는 건가.


찰나의 고민도 잠시. 그는 내 손을 잡고는 다시 그의 차에 태웠다.


" 오늘은 진짜 피곤해요. 나 진짜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제발. "

" 뭐야. 게임을 걸었으면 뭔가 시작을 해야지. 잔뜩 기대만 시켜놓고 왜 시작을 안 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안전벨트를 채웠고 나는 안전벨트를 잡고는 쭈욱 늘렸다 잡았다를 반복하며

" 와 미치겠다. 정말. 이건 아닌데. 난 싸울 총알도 없다고. "




그러자 그가

" 총알이 왜 필요하지? 넌 그냥 몸만 있음 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차를 몰아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강남의 부띠끄. 편집샵.

" 이브닝으로 세팅 좀 "


내가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되자 점원들과 매니저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나를 이끌어 드레스룸으로 데려가서 이 옷 저 옷을 입히고는 이내 나를 이브닝드레스를 입혀 세팅을 했다.

가방과 신발까지 명품으로 맞춘 채.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나를 정장으로 갈아입히고는 그 옆에 헤어숍으로 가서 머리를 하고 그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그는

" 늦었어. 서둘러. "


그렇게 나를 차에 구겨 넣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웬 파티장. 플래카드를 보니 회사 창립기념회 겸 M&A 장.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게 와인잔을 건넨 그가 내 귀에 대고

" 저기 오네. 반갑게 인사해."


그가 말하는 곳을 보니 놀랍게도 세희가 그곳에 서 있었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언니 오랜만이야. 반가워."

" 네가 여긴 어떻게...?"




곁에서 어느새 다가온 한 팀장이 그녀에게 반갑게 허그를 하며

" 저는 복귀하실 줄 알았더니 이렇게 더 큰 회사로 가실 줄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박대표 님."

' 아 세희는 박 씨 가문에서 태어났구나.'


자세히 보니 블루진 그룹과 IT회사 샤인 사이의 M&A 기념회장이구나. 여기 대표가 세희 아버지시구나. 세희는 여전히 신라 집안의 사람으로 태어났는 가보구나.


" 너 괜찮은 거야? 이제는?"

" 언니가 걱정해 준 덕분에."


그렇게 말하며 세희는 살며시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는

" 탐이 나는 게 생겼거든."


이라고 말하며 웃으며 와인잔을 부딪혔다. 그러자 태호가 다른 게스트에게 인사를 하다 돌아와 내 곁에 와서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군. 미인들이 이렇게 둘이나 같이 있다니. 질투 나게."


그렇게 말하며 다정히 내 손에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를 이끌고 출입구 방향 쪽으로 향했다.

그때

" 그럼 오늘의 M&A 주역 박세희 본부장님을 소개합니다."




라고 마이크에서 울려 퍼지며 스포트라이트가 세희를 비췄다. 그 순간 세희는 잔을 높이 들며, 주변에 인사를 건넸고 주변의 사람들은 너나없이

" 건배"


라고 외치며 잔을 높이 들어 잔을 부딪힌 뒤 와인을 마셨다.

"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조연들은 물러가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태호는 내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 어떻게 된 거야?"

" 보시다시피."

운전을 하던 그는 피식 웃으며 내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너무나 태연한 세희의 태도도 그렇고 그의 반응도 그렇고 나는 도저히 계산이 서지를 않았다. 시험 때문에 너무 기를 쓴 것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며칠 밤낮을 일과 공부에 더더욱 몰입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기에는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세희가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가.


내가 그를 잠식하려던 것을.


내게는 당장 플랜 B가 필요하다.


그의 피를 말려 애간장을 녹이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려던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이상 나에게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보다 더 그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나. 애초에 그가 내게 질리도록 할 요량이었던 계획은 실패로 거듭나 버린 것이고 그 와중에 그녀가 탐이 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 도대체가 세희나 당신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 기뻐해야지. 오늘이 드디어 세희가 나를 내려놓은 날인데. "


" 무슨 말이야? 당신을 놓다니?"

" 세희가 드디어 원하는 것이 생긴 날이잖아. 그중 하나를 얻기도 한 날이고."


세희가 그를 내려놓았다는 말은 세희가 원하는 것이 생겼다는 말이고 그의 말대로라면 세희는 회사 M&A에 목표를 두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를 통해 뭔가를 얻고 자 하는 다른 게 생겼다는 말인가. 어쨌든 이러한 상황에 아무 대책 없이 그의 차에 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생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의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밖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장마를 알리기 시작하는 비는 바로 폭우처럼 확 쏟아졌다 멈췄다 반복하며 사람을 골탕 먹이듯 그렇게 바람결에 날려가며 흩뿌려지고 있었다. 천천히 차를 타고 나를 따르던 그가 결국에는 그 빗 속에 울려대는 견적소리를 뒤로 비상등을 켠 채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리고 어둑해진 가로수 사이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내게 다가와 뒤에서 껴안았다.

" 너까지 나를 버리려고? 세희가 버렸다고 너까지 떠나려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문득 발길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의 눈은 우수에 젖은 눈빛.

가로등 불빛에 산란이 되어 퍼진 그의 눈가는 이미 빗줄기에 젖어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지만 분명 그의 눈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태호의 차에 올랐고 그는 말없이 차를 몰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달리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자 스탠드바로 걸어가서 천천히 코냑을 꺼내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 쓱 입을 닦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있던 위스키를 한잔 마셨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예쁘게 놓인 애플망고 한 조각을 주자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입 먹었다.


그리고 다시 밸런타인 30년 산 한잔을 들이켰다. 나는 과일치즈를 손에 쥐어 그에게 가져다주었고 그는 내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내가 손을 들어 그의 허리에 대자 그는 이내 내게 키스를 해 왔다.

술내음. 과일 치즈 내음.




본능을 잃어버린 그가 선택하는 욕망을 채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보였다. 그에게 항상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욕망이다. 그런 그의 심리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 바.

그래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레 눈에 그려졌지만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손길도 그의 마음도.


어쩌면 언젠가 닥칠 일이라면 적어도 그가 본능을 매우 갈구하는 타이밍이 가장 적절할 것만 같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저 목적 없이 그가 원하는 때 아무렇게나 그에게 응하는 게 아니라 그의 욕망을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타이밍이 내가 필요한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지 않을까.


그의 거친 숨결이 내 온몸을 타고 느껴진다.

그는 그렇듯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탐할 때도 일을 할 때도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그의 것을 만들고야 마는 사람. 그런 그 앞에 나는 한낯 그에게 먹이가 되고자 민낯을 드러낸 순수한 먹잇감.


그의 부드러운 손놀림에 마치 잘 길들여진 악기처럼 들썩이며 그의 숨결에 나의 숨결도 요동치며 그의 두근대는 심장소리에 응답하듯 두근 대는 내 심장이 맞닿아 그렇게 밤은 뜨겁게 달궈졌다.


예상치 못한 그와의 하룻밤.

새벽 3시 무렵. 나는 화장실로 향했고 거울을 보다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예상과 달리 화장실은 화이트 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디자인. 모든 선은 직선. 화려할 것만 같던 그의 화장실은 의외로 단순하고 심플했다.


예상과 빗나간 한 가지. 그렇게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옆에 방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에 들어서자 정갈히 진열된 옷장 속에 그의 의상이 색상별로 들어가 있었다. 가운데는 커프스며 시계며 타이핀이며 각종 장식품들. 오로지 정장 슈트에 맞춰 입을 수 있도록 세팅된 것들. 문이 닫힌 저곳에 아마도 평소 잘 안 입는 캐주얼한 옷들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에 나는 그 옷장의 문을 열었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여자 정장 몇 벌이 걸려 있었다.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는 옷. 요즘은 유행에 맞지 않아 보이는 옷들이지만 나름은 세련되고 기본 스타일의 정장도 몇 가지 있어서 나는 그중에 검은색으로 골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침실로 들어서자 그는 여전히 단잠에 취해 있었다.

그의 곁으로 가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그는 이내 뒤척이며 내 손을 끌어당겼고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이불속에 집어넣고 조용히 문을 닫고 침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 어제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 쉿"

나는 급히 한팀장의 입을 막고는 비상구로 향했다. 의아해하는 그.


" 뭐 낙하산일줄은 알았지만 박세희 씨 낙하산인 줄은 몰랐네.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문득 비상구 옆 창문을 바라봤다.


' 세희 낙하산이라고? 그가 그렇게 오해하는 게 내게는 다행인 건가?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려는 찰나,


" 세희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 음 우리 회사에서 박전무 모르면 간첩이지. 창립 멤버인데. "

" 그럼 네가 말하던 그 이상형이 세희였어?"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내가 이상한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순간 비상구 문이 열리며 다른 직원들이 들어왔고 그 직원들을 본 한 팀장은 내게 소리쳤다.

" 아니 정대리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지.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합시다. "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자 방금 비상구로 들어선 직원들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 이해해요. 공사 확실한 사람이라... 어쩌겠어요. 을인 우리가 참아야지. 힘내요. "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내게 다가와 등을 토닥였다.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 휴우. 순발력 하고는. '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사서 자연스레 옥상으로 향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 아니 아까..."

" 너는 세... 암튼 어떻게 아는 사인 거야?"

기습적인 그의 질문에 나는 당황하며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그때 문득 불같이 떠오른 생각.


" 아 어렸을 때 한동네 살았어. "

" 한 동네? 그럼 너도 엄청 부자였던 거야?"

나는 다시 눈알을 굴렸다. 분명 내가 듣기로 태호말로는 세희가 과외를 하러 왔었다고 했는데...


" 아니. 세희가 그때는 나와 비슷했다는 의미지. "

그러자 그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 이상하다. 박 회장은 원래 잘 살았는데... 박 회장 막내딸이 당신과 같은 동네 살았다면 말이 안 되잖아?"

" 뭐 말이 안 돼. 다 집마다 사연이 있는 거지. 괜한 이상한 오해 말고."


그러며 커피를 한 모금했다.

' 세희가 처음부터 그 집에서 태어난 건 아닌가?'


오히려 내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방긋 웃으며

" 뭐. 세희 씨는 유학 가서 우연히 몇 번 수업을 듣다 본 게 다 이긴 한데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

나도 둘이 헤어진 걸 최근에야 알았거든. 유학 당시도 그렇고 입사 당시도 그렇고 워낙 둘 다 넘사벽 스펙에 있는 집 자제들이다 보니 우리 집 정도는 그냥 중소기업 수준이라서 감히 엄두도 못 냈었지. 최근에야 집안 형편이 좋아지고 해서 우연히 간 자리에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철옹성은 여전하더군.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바라봤다.

" 근데 의외는 네가 그 자리에 국내 한정판을 두르고 나타났다는 거지. 그것도 우리 보스랑."




" 그건 세희가 준거야. 초대해서. 축하해 달라고. "

조금은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가 이내

" 뭐 세희 씨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니까. 이해해. 본인 친구들이 어디서 빠지는 꼴은 또 못 보는 성격일 테니.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긴 하는구나."


' 이제는 그의 말에 뭐라 더 거짓말을 늘어놔야 될지 대책도 없다. 어떻게 하지?'


내가 하아 하며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 근데 넌 이혼은 한 거야?"

문득 한 팀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빤히 곁눈질로 바라보며,


"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 아 그냥. 행동으로 봐서는 이혼은 아닌 거 같고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싱글 같고... 좀 그래."

그러며 그는 이내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마셨다.


" 이혼이라..."

나는 물끄러미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문득 떠오른 정우와 정영.


미친 듯 휘몰아친 일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목표한 바를 얻기 위해 그들의 존재를 잊기로 했었다. 그래서 그곳을 벗어났었고 나는 이혼서류도 보냈지만 달라진 것 없던 현실. 문득 그런 현실이 현실감이 불현듯 가슴으로 와닿았다.

' 그럼 나는 불륜녀가 되는 건가...?'


어차피 내가 계획을 세우고 이곳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이상은 나는 저 꼬리표를 뗄 수는 없는 상황.


이미 각오를 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인 법. 문득 머릿속에 애써 지웠던 그들이 떠오르려고 했고 나는 급히 커피를 들고 계단을 달리듯 내려오며 카운터를 셌다. 33...30...28... 그러자 급히 내 뒤를 쫓아 내려오던 한팀장이 내 팔을 잡고는


" 야 그만해. 그냥 엘리베이터 타자. 그런다고 살 안 빠져. 이미 먹을 만큼 먹었어. "




회사를 옮기고 나름은 아끼고 살아온 덕분에 꽤나 돈을 모은 나는 산비탈 쪽방촌에서 조금 더 내려와 학교 앞 원룸가로 가서 보증금을 더 올리고 방을 구했다. 방학이라 제법 방이 나와 있었고 주말이며 시간이 날 때마다 발품을 팔아가며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보증금 6천에 월 40짜리 방을 구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끼니는 회사 구내식으로 대신하며 모은 돈. 쓰는 곳이라고는 계절별 갈아입는 정장 몇 벌과 화장품이 다인 소비. 여느 여직원처럼 쇼핑을 즐기지도 않았고 그 흔한 미용실도 제대로 안 갔다. 오로지 악착같이 모은 돈들.


덕분에 나는 회사생활 3년 차에 대학원 등록금을 제하고도 꽤나 돈을 모았다. 틈틈이 리포터를 대신하는 아르바이트도 제법 쏠쏠했고 무엇보다 회사의 연봉이 옮기고 난 뒤 제법 오른 영향이 컸다. 회사의 성장세는 가팔랐고 덕분에 보너스에 성과급도 생각보다 쏠쏠히 들어왔다.


나름 이사한 집이 마음에 들어 뿌듯하게 생각하며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 털썩 누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태호의 전화. 입사하고 태호가 내게 전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여보세요?"

" 흠. 지금 와 줄 수 있어?"


왠지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잔뜩 술에 취한 듯 보였고 주변이 조용한 걸로 봐서 그의 집인 듯했다.


" 무슨 일 있어요? 전화를 다하고."

" 오늘은 네가 꼭 같이 있어 줬으면 해서. 올 때 그 옷도 입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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