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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그녀의 자리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by moonrightsea

그녀의 한기가 느껴져 잠에서 깨어났다.


둘러봐도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항상 곁에 있다고 느껴왔기에 그녀의 자리는 내게 크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닫고 정영의 방으로 향했다.

정영의 방문을 열자 정영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영에게 다가가자 아들은 울고 있었다.

" 너도 느낀 거지?"

"..."

정영은 말이 없이 눈물만 흘렸다.

" 정영아. 너 무슨 말이라도 해봐. 엄마가 오해한 걸 수도 있잖아. "

" 엄마가 떠난다고만 말했어. 그게 다야. "


나는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들은 내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내 정영의 방에 불이 켜졌다.

"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


선화 씨. 아마도 나와 정영의 대화를 들었나 보다.

당황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정영엄마가 다녀갔나 봐요. 애기 깰라 어서 가봐요. 상황은 우리가 가서 설명하면 되니까. "


" 정말 미안해서 어쩌죠? 하지만..."

" 가면 상황은 잘 설명할 테니 자세한 건 나중에 정영엄마가 오면 그때 차근차근 물어봐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날이 밝자 나는 소방서에 연차를 쓰고 정영의 학교로 향했다. 담임을 만나고 정영을 데려 나오며 현장학습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 정영아. 대충이라도 어디에서 느껴지는 거 없어?"

" 흠... 절레절레..."


정영도 머리를 부여잡고 그렇게 연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되는대로 일단 차를 몰아 부석사로 향했다. 왠지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단풍이 제법 곱게 물든 부석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그곳에 여전히 의상이 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그렇게 미친 듯 차를 몰아갔지만 그곳에서 의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없으니 내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다시 차를 몰아 내친김에 감은사로 향했다.

동해로 길게 뻗은 국도를 따라 한참을 달려 향한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다되어서 숙소에 도착해 그녀와 예전에 묵었던 호텔방에 정영과 다시 들어가자 문득 그녀와의 예전 생각이 났다.

아름다웠던 그녀. 너무나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그녀.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아버지. 어머니가 많이 힘드셨나 봐요. "

" 아마도 그럴 테지. 오해한 거니... 겨우 돌아왔는데... 하필 그때."

" 설명할 틈도 없으셨잖아요. 오늘은 일단 우리도 여기서 한숨 자요. 제가 그동안 좀 더 찾아볼게요. "


정영이 특별한 능력을 타고 난 걸 알았지만 유독 엄마에 관해서는 더 잘 알고 느꼈다. 그녀의 마음이 힘들라 치면 정영은 어떤 능력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며 급속도로 공부에 몰두했다.


가끔씩 새벽까지 정영이 공부에 매진할 때면 저 아이가 과연 초등학생이 맞나라는 의심이 들정도로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느 또래와 달리 축구를 즐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TV를 보지도 않고 정영은 그렇게 책을 즐겼다. 덕분에 정영은 또래와 다르게 자격증을 종류별로 따고 나름 논문도 찾아가며 볼 정도로 이제는 제법 수재소리를 듣는 6학년이 되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다는 것.


정영은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왔고 집에서 내도록 하는 일이 인터넷에서 논문을 뒤져 읽거나 온라인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일과가 다였다. 아마도 4학년 무렵부터는 그래온 것 같다.


그나마 초등학교 1학년때만 해도 반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기도 하였지만 어느 날부터 정영은 더 이상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목표도 이미 정한 정영. 정영의 목표는 NASA에 들어가는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문득 내게 천문대에 데려가자고 하더니 그곳에서 한참을 별을 보던 정영이 내게

"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동안 엄마 걱정 안 되게 저도 나름 제 꿈을 키워볼래요."


꿈이 명확하기에 오히려 흔들림 없던 정영. 그런 정영을 보며 나는 새삼 더 정영을 통해 마음을 다 잡고는 했다. 오히려 정영이 더 어른스럽게 잘 버티기에 나 또한 그런 정영을 바라보며 연수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왔다.


어린 나이에 아무리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정영은 입학하면서 부터 준비물을 혼자 챙기고 아침을 내가 차려두면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해 놓고 그렇게 학교에 갔다.


어린 나이에 싱크대가 손에도 닿지 않은데 의자를 받치고 그 위에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렇게 떠나버린 연수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기꺼이 다녀오라고 말한 우리기에 그녀의 선택을 믿고 기다리고자 그렇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건 아니었다.

이 순간 일이 이렇게 꼬일 것은 아니었다.




'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자는 둥 마는 둥 밤잠을 설친 채 눈을 뜨고서야 불현듯 한 곳이 떠올랐다. 지리산.

정영이 안그래도 내게 와서 말했다.

" 엄마의 기운이 지리산에서 느껴져요."


나는 급히 차를 몰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제발 제발 그녀가 그 선택만은 하지 말기를 손꼽아 기도하며...


지리산입구에 도착하고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도예 마을 입구를 확인한 나는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울창한 숲 속 입구로 들어서기 전에는 어디가 입구인지 조차 구분이 안 가는 비포장길을 1시간 반을 넘게 올라 다시 차에서 내렸고 정영의 손을 잡고 다시 1시간을 더 걸어 올라가자 산 중턱. 지리산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가마터가 보였다.

흙과 벽돌로 쌓아올린 커다란 움집가마터가 몇개씩 쭉 연이어져 있고 그 앞에는 미처 소성되지 못한 도자기며 그릇의 파편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낡은 기와집이 보이며 그 옆 부엌에서 웬 노파가 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 저 혹시 이렇게 생긴 여자 못 보셨어요?"

" 아... 뉘신지? "

" 가족입니다. 애타게 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 그 사람은 왜 찾누? 아침에 나물 하러 산에 갔는데?

" 음... 어디 보자. 저 쪽 샛길로 올라가면 작은 텃밭이 나와. 거기로 가보슈."


나는 정영과 다시 손을 잡고 나무지팡이를 하나 챙겨 산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더 산을 오르자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밭 한가운데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여인이 밭을 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연수야. "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나를 돌아봤고 놀라서 일어나는 그녀의 머리 위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나는 미친 듯 눈물이 났다. 정영과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 왜 가버렸어. 왜...? 말이라도 하지...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데..."

" 엄마... 보고 싶었어요. "


그녀는 그렇게 우리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마터로 내려와 평상에 앉자, 노파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 그만 가보셔도 돼요. "


" 괜찮소. 필요한 것 있음 말 하이소. "

" 아뇨. 제 식솔들입니다. 제가 챙기겠습니다. "

" 그럼 이야기 나누시오. "

그렇게 말한 노파는 유유히 산아래로 내려갔다.


멀어지는 노파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연수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 당신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설마 나 때문인 거야?"

나는 그녀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바라보며 눈물이 맺혔다. 왠지 너무나 속이 상해 더는 물어볼 수도 없었다.

" 당신 때문이 아니야. 하늘을 거역한 죄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고는 이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둥글게 말아 동여 맸다.


" 아... 당신..."

나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이내 나를 밀어내며,


" 아기와 아내는 어떻게 하고?"

" 아... 선화 씨... 당신이 잘못 오해했어. 선화 씨는 그냥 잠시 우리 집에 들어와 지내는 것뿐이야. 당신 기다리며."


" 나를... 기다렸다고? 그럼 당신의 아내가 아니란 말이야?"

" 흠... 당신이 그렇게 오해할까 봐 나도 많이 걱정했어. 하지만 사실이 아냐. 정영아 뭐라 말 좀..."

" 어머니 그건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희도 너무 황당했어요. 처음에."


우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평상에서 일어나 마당 가운데 높게 자란 커다란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난... 당신이 정영을 위해 다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 알았어요. "

그러자 정영이 연수에게 달려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연수의 앞으로 가서 연수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 어머니. 잘 아시잖아요. 언제나 느껴왔잖아요. 우리. 우리가 늘 곁에 있다는 것을. "


" 미안해. 정영아. 엄마가 오해했구나. "

" 끝까지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여보."

연수는 정영의 손을 잡고 내게 다가와 내 머리를 끌어안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선화 씨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연수가 떠나고야 알게 되었다.

정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부모 모임이 있어서 내가 연차를 쓰고 집에 돌아갔을 때 그 밤. 늦은 시각 선화 씨가 전화가 왔었다.

" 왜 집 나간 아내를 못 잊는 거죠? 왜 당신 곁에서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안 보여요?"


문득 그녀의 말에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녀가 친절히 내게 정영의 안부를 물을 때만 해도 나는 평소 그녀가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하길래 정영도 그런 의미에서 예뻐하고 챙기는 줄만 알았고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 마음속에는 오로지 연수밖에 없어서 다른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믿었고 그녀가 항상 같이 있다고 생각해 왔기에 그녀의 빈자리를 내가 대신하는 것뿐 다른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 선화 씨의 말은 적잖게 부담이었다.

" 선화 씨. 오늘 술 많이 먹은 거 같은데... 그만 집에 들어가요. "


" 힘들게 말하는데 정말 힘들게 말한 건데 정말 제 마음은 들으려 들지 않는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린 뒤 한동안 선화 씨를 피해 다녔다. 어떻게 그녀를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런 내 행동이 그녀도 의식이 되었는지 한동안은 그녀도 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주기적으로 거의 한 달에 한두 번은 그렇게 술이 떡이 되어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다 기어이 하루는 우리 집 앞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고는 그녀의 집에 데려다준 적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부축해서 안방에 재우고 나는 정영의 방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다음날 콩나물국을 끓여 그녀에게 내어 주며

" 속은 좀 풀렸어요? 이런 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데... 주변에 찾아보면 좋은 남자들 많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요. 술도 그만 드시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정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 정영아? 이 누나가 엄마 하면 안 돼?"

그렇게 넉살 좋게 콩나물국을 들이키며 정영에게 물었고 그런 그녀에게 정영은

" 네. 엄마가 화낼 거예요. 안 돼요."


그 어린 녀석이 그렇게 꽤나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어느 날 선화 씨는 서울에 직장을 다니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고 그 후 보니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육아 휴직을 쓴 뒤 한동안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불쑥 그녀가 며칠 전 돌베기 아이를 안고 나타나서는


" 이게 다 당신과 그 여자 때문이에요. 책임져요. "


그렇게 말하며 우리 집에 들어와 버티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어도 영문을 알 수 없었고 그녀는 다만,


" 당신 아내는 알 수 있어요. 당신 아내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그것만이라도 알려줘요. 네?"


그렇게 말하며 연수의 행방을 찾아 집에서 버티며 나가려 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정영과 같은 방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날따라 선화 씨가 아파서 대신 아이를 돌보다 그 방에서 잠이 든 것이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자초지종을 들은 연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선화 씨를 보고 아이를 보고서야 연수는 입을 열었다.


"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




그런 연수를 보며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 당신은 알고 있죠? 그렇죠?"


선화 씨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말해봐요. 당신은 아이 아빠가 어딨는지 알잖아요?"


그러자 연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선화 씨 사정은 딱하게 되었지만 부부 일이니 제가 나설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우선 오늘은 여기서 묵어요. 날이 밝은 대로 당신 남편은 내가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 볼게요. "


그렇게 연수가 말하자 선화씨는

" 그럼 당신은 아이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저도 같이 가면 안되요?"


" 미안해요. 선화씨. 그건 차후에 이야기 해요.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

연수의 굳은 표정을 보고 선화씨는 이내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는 일어나며,

" 내일 그 사람만나고 나면 여기로 연락주세요. 그럼 기다릴게요. 이제까지 기다렸으니."


생각보다 선화씨는 별 말 없이 그렇게 집을 나섰다. 선화씨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그제야 한숨이 놓였다.

" 당신 괜찮은거야? "


내가 걱정스레 연수에게 묻자, 연수가


" 어차피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야. 매듭지을 일이 있다면 매듭지어야지. "

그녀의 말에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몹시도 초췌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 안고는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 이제껏 고생했는데... 이제는 마음 내려놔도 되지 않아?"


" 인간으로 살아가기 참 힘드네. "

연수는 한숨 섞인 말을 그렇게 농처럼 내게 건네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내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 당신 품... 그리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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