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가게는 거의 대부분 불이 꺼졌고 문을 연 곳이라고는 술집 뿐이었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 술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편의점에서 라면과 냉동 피자를 사서 다시 내 캠핑카로 향했다.
" 그냥 그러지 마시고 저희 집에라도 가시겠어요?"
" 아 저는 여기가 익숙해서요. 왜 불편하세요? "
" 아뇨. 그것보다 걱정돼서요. 아직 한 명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휘우님을 그쪽도 알게 된 거 같은데 이대로 밖에서 생활하시는 게 안전상 괜찮은지 염려되어서요. "
" 하핫. 뭐 어때요. 여기 이래 뵈도 나름은 안전합니다. 보시다시피 때 되면 저렇게 해경에서 순찰을 수시로 와주시고 도로가로 경찰도 수시로 순찰 돌고 저기 보이시죠? CCTV도 있고 뭐 바로 위에 이렇게 가로등도 있고 오히려 아파트나 주택 단지보다는 치안이 더 나아 보이는데요?"
" 일단 오늘은 제가 상부에 보고해서 곁에서 있을 테지만 내일도 여기 머무시는 건 힘들어요. "
" 음. 그럼 오늘만 오늘만 제 마지막 자유를 누려보죠. 뭐.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모닥불을 지폈다. 그리고 라면물을 올리고 곁에 사 온 피자를 철판 위에 올렸다. 몇 번의 요령으로 타지 않게 노릇하게 구워낸 냉동피자는 마치 화덕에 구운 것 마냥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늘어나 제법 모양새를 갖췄고 라면은 그새 보글보글 끓어 주린배를 향해 후루룩 넘어갔다.
뭐라 더 말할 것도 없이 곁에 두었던 캔맥주를 따서 몇 모금 마시고 또 그렇게 피자를 한입 베어 물고는 연이어 몇 조각을 더 먹어치우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고 보니 민경사는 피자를 손에 든 채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 그만 긴장 푸시고 이제는 좀 드세요. 라면도 다 불었어요. "
" 이런 때 보면 의외로 휘우님은 간도 크시고 참 낙천적이시네요. "
" 뭐 두려울 게 없는 거겠죠?"
" 가족들 걱정은 안 되세요?"
" 가족이라..."
" 이렇게 나와 계신 거 보니 사연은 있으신 듯한데 그래도 댁은 아니라도 숙소는 들어가 보셔야죠?"
" 가족은 따로 없어요. 이혼한 지 벌써 2년 차라..."
" 미안해요. 아픈 과거를 들출 마음은 없었는데..."
" 아뇨. 전혀. 그저 저와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니. 뭐 제가 이혼남이라 실망하신 건 아니죠?"
" 네? 그럴 리가요. 후훗. 전 영광인걸요?"
" 네? 그게 무슨... 집도 없이 떠도는 고집불통 이혼남을 보호하는 민경사님이 오히려 더 안타깝게 보일지 모르는데... 제가 더 미안한 걸요?"
" 후훗. 제게는 이게 밀회죠. 일종의."
" 밀회?"
" 이런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렇죠? 하지만.. 제게는 평소와 다른 일탈 같은 거라서요. "
" 이런 걸 밀회라고 표현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지내셨길래...?"
조금은 생각이 깊어 보이던 민경사.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 음... 본의 아니게 일에 미쳐 살아서 또 무엇인가 쫓기듯 지내며 살다 보니 혼자 기준에 정말 칼날 같은 생활을 해온 거 같네요. 휘우님을 보니. 후훗. 눈뜨면 출근에 해지면 보통 사람들은 퇴근하고 일상을 보내는데 저는 해지고 다시 강의에 연구에 거의 다음 날이 바뀌기 전에 퇴근해서 다시 보고하고 잠들고 다시 눈뜨면 출근에... 그런 생활을 거의 10년을 반복해 오고... 정신 차려보니 저 혼자 더라구요. 하지만 그런 일상이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캬아~"
민경사는 그렇게 말하며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며 피자 한 조각을 한입 베어 물었다.
" 음. 이건 미국에서 먹었던 맛과 비슷하네요. 의외인데요?"
" 드실만 하죠? 나름 장작불 맛을 더하면 의외로 고급져진답니다. "
나도 그렇게 말하며 크게 한입에 피자 한 조각을 털어 넣었다. 그러자 민경사가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는 나를 바라봤다.
" 우와 정말 입이 크셨네요? 평소 말이 없으셔서 전혀 몰랐는데 오늘 보니 정말 입이 크셨네요?"
" 크하하. 제가 좀 입이 커요. 그래서 잘 안 웃죠. 너무 실없어 보일까 봐."
호방한 내 웃음에 민경사는 이내 방긋 웃어 보이며 모닥불을 바라봤다. 불 앞에 앉은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시각이 늦은 탓일까. 든든히 속을 채웠음에도 새벽 한기는 몰려들었고 민경사는 곧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나는 그런 민경사를 바라보다 문득,
" 아 내 정신 좀... 미안해요. 제가 이 생활에 익숙해서 그만 실례했네요. 많이 추우실 텐데. 잠시만요. "
캠핑카로 들어온 나는 담요를 가져다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고 그녀는 포근히 감싸주는 담요를 몸에 감은 채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려 팔을 뻣었다.
" 고마워요. 음... 이제야 한결 낫네요. 훨씬 따스한 것 같아요. "
" 후훗. 이렇게 보니 민경사님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으시네요. "
" 비록 제가 특수훈련을 받은 장교출신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들의 타고난 체격과는 차이가 나죠. 더구나 근래 들어 사무직으로 이직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
" 아휴. 그렇게 말씀하시니 괜히 보호 본능 자극됩니다. 약한 척 마십시오. 그래도 특수훈련받으신 분인데."
" 후훗. 그렇죠? 그래도 제가 보호해드릴게요. 너무 염려 마세요. "
그렇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쪼이며 한동안 우리는 몇 마디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더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몰려드는 한기로 캠핑카로 들어와 자리에 누었다.
혼자 잠들 때는 몰랐던 사람의 온기.
제법 넓다고 생각했던 캠핑카 침대는 둘이 누우니 꽉 찬 느낌이 들정도로 좁게 느껴졌지만 오늘따라 그리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왠지 모를 안정감. 편안함. 그저 근처에 사람이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마음이 들어 금세 잠이 들었다.
" 타시죠. 모셔다 드릴게요. "
" 괜찮아요. 택시타면 금방인걸요. "
" 아뇨. 그것보다 제가 모셔다 드리는 게 마음도 편하고 음.. 그렇지. 제가 보호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 음.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드릴게요. "
차를 몰아 민경사가 거주하는 아파트로 향했다.
민경사의 집은 해경의 숙소 바로 옆에 내가 입주하려 했던 새 아파트 단지내에 있었다. 한참 아파트가 올라가며 입주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사흘이 멀다하고 오갔던 곳이었건만 막상 입주를 하고난 후로는 근처도 와보지 않았던 곳.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단지는 인근에서도 손에 꼽히는 새단지로 높기도 했고 규모만으로도 눈에 띄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앞 단지에 전망 좋은 층에 자리 잡은 그녀의 집. 그녀는 차라도 마시고 가라며 나를 집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이끌림에 집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마치 인테리어 모델하우스를 온 것 마냥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군더더기는 없는 간소한 가구들과 벽에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내부. 씽크대와 진열장에는 아무것도 올려진 것이 없었다. 집안 내부에는 그 흔한 화분하나 없이 오로지 쇼파와 거실 한 복판을 차지한 책상과 서재.
내가 거실을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자 그녀는 내게 방안을 둘러봐도 된다고 말했고 나는 궁금증에 이방 저방을 둘러 봤다. 방 한 칸은 운동기구로 가득차 있었고 한 방은 침대와 화장대로 한 방은 옷 방인듯 보였다. 그곳들 마저 위에 물건하나 그냥 올려져 있는 게 없었다. 과연 여기서 생활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리 정돈이 깔끔하게 되어 있는 집.
" 성격이 정말 철두철미하시군요. "
" 뭐. 보기 나름이죠. 저는 집안에서는 그렇게 활동반경이 큰 편이 아니라서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다 보니 거의 어질 일이 없어기도 하구요. "
" 아 그래서 집이 이렇게 깔끔하군요. "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이사 온지 이제 겨우 일주일 째라 그런 거니 너무 완벽주의로는 안봐주셔도 되요."
"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해도 되네요. 이사온 그대로라고 보면 뭐. 그래도 용케 짐은 다 푸셨네요? "
" 짐은 대부분 여기 와서 장만한 것들이에요. 국내 입국해서 한 삼일 날 잡고 근처 쇼핑몰을 돌면서 주문하고 바로 배송 받아서 세팅한 거죠. 정리는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저는 정말 몸만 들어왔어요. 미국에서는 거의 숙소 생활해와서 짐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들어올때 대부분의 짐은 처분했어요. "
" 그럼 거의 새살림 장만한 기분이 드셨겠는데요?"
" 뭐. 살림에 그닥 재능이 없어서요. 뭘 사야할지도 몰라서 대충 모델하우스가서 거기 있는 거 중심으로 가구만 장만해서 들어왔어요. "
" 크하하하하"
" 왜... 그러시죠?"
" 아 처음 들어왔을 때 문득 모델하우스 들어온 기분이 들었었거든요. 근데 왜 그런지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어서요. 민경사님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으셨군요. 모델하우스라..."
내 반응에 그녀는 다소 민망했는지 언제 갈아 입었는지 모를 청바지 위에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로 얼굴을 가렸다.
" 에이 너무 부끄러워 마세요. 그럼 모처럼 일요일인데 아참 민경사님은 여기서 처음 맞는 주말이시죠? 같이 근처 구경이라도 가시겠어요?"
" 휘우님 그렇게 돌아다니시는 건 위험할 텐데..."
" 음 그렇다고 제가 여기 있는게 더 민경사님께 위험할 수도 있죠? 안그래요?"
" 에이 휘우님도. 그래요. 그럼 휘우님 믿고 한번 나가보죠. 대신에 이상한 낌새 느끼시면 바로 알려주셔야 해요. 아셨죠?"
" 넵. 가시죠."
나도 모르게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민경사를 안내하며 그렇게 우리는 주말 근교로 나들이를 나섰다.
주말이면 늘 머물던 캠핑카를 떠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모처럼의 시내 구경. 시내라고 하기에는 별 볼 것 없는 좁은 동네건만 시장을 가서 주린 배를 채우고 근처 공원을 산책을 하며 음악을 듣고 또 함께 걸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문득 배가 고파 다시 항구로 가서 회 한사라를 시켜 매운탕에 식사를 하고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해는 그렇게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 오늘은 저희 집에서 주무세요. 마침 제가 저녁에 야간 근무 들어가요. 그러니 캠핑카에서 짐챙겨 나오셔서 저희집에서 주무시고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다른 분들과 같이 지내세요. "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외간 여자집에서..."
" 외간 여자는 아니고 제가 보호자 이죠. 잊으신 건 아니시죠?"
" 그렇기는 한데..."
" 그럼 가서 짐챙겨 오시죠. "
그렇게 그녀의 제안으로 나는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낯선 공간. 낯선 공기. 그녀의 침대.
늘 맡아오던 내 커피향과 달리 그녀의 향이 베인 침대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이 말똥말똥. 한참을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그렇게 겨우 잠이 들었다 깼다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잠을 설치다 겨우 잠이 들었던 찰라. 현관문 소리에 잠이 깨 보니 그녀가 어느새 야간 근무를 마치고 들어왔다.
" 미안해요. 잠을 깨우려던 건 아닌데..."
" 아 아니에요. 덕분에 편하게 잘 잤어요. 어제 저 때문에 잠도 못주무셨는데 야간 근무까지 하고 오셔서 많이 피곤하셨겠어요. "
" 저야 뭐 일상이라 괜찮아요. 잠시만요. 저 잠시 씻고 올게요. 쉬고 계세요. "
샤워를 마치고 일상복으로 갈아 입은 그녀가 나와서 급히 냉장고를 뒤지고는 이것저것 꺼내더니 토스트에 계란 후라이를 해서는 내게 내어 놓았다.
" 아침은 드시고 출근하셔야죠. "
" 감사합니다. 이렇게 챙겨주셔서."
기대한 일상은 아니지만. 낯선 일상. 낯선 이와 맞이한 아침 식사. 그리고 아침.
싫지만은 않은 하루. 아니 근래 느껴보지 못했던 평범하면서도 나름은 행복한 하루.
나는 어쩌면 이런 일상이 내게 다시 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나.
내게 주어진 온전한 행복도 아닌 우연의 일들이지만 나는 왠지 이 행복이 마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