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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rightsea Oct 06. 2023

#1-14. 다섯 번째 별

다르게 느껴지는 하루

" 미안해요. 너무 허기져서 먼저 먹고 있었어요. "

샤워를 마친 민경사가 나오며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방긋 웃었다.

" 뭘 그렇게 미안해 하세요. 오늘 민폐는 제가 더 졌는데요? 덕분에 오늘은 퇴근도 일찍하고 이렇게 집에서 잠도 잘 수 있게 되었는 걸요. 그러니 편하게 계세요."


그렇게 말한 민경사는 식탁으로 다가와 나와 마주보며 앉아 맥주잔을 들었다.

" 지난번에 보니 술도 꽤나 잘 드시더니 오늘은 그리 안 땡기시나 보네요."


맥주잔을 들고 홀짝이는 그녀를 보고 내가 말하자 민경사는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 흠. 늘 같이 지내던 박경장이 그렇게 되니 조금 신경이 쓰여요. 어째든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조금 혼란 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민경사는 시원하게 맥주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닭 가슴살을 조금 덜어 겨우 입에 물더니 한참을 오물거렸다.

" 입맛도 없으시나보네요? 이 밤에 먹는 치맥은 진리인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닭날개와 닭가슴살이 붙은 치킨 한 조각을 들어 열심히 뜯었다.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 마냥 개걸스레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경사는 이내 '풉'하고 웃었다.


" 어쩌면 이런 면이 휘우씨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

" 다르다? 음. 제가 생각해 보니 조금 제가 단순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음...어떻게 다르죠?"

" 그냥 뭔지 모르지만 같이 있는 사람이 편안해지도록 만드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 김부장님도 항상 휘우씨 곁에서 늘 붙어지내시는 거 맞죠?"


" 하하하하. 저 남자 안좋아합니다. 여자 좋아합니다. 뭐. 어떤 면에서는 답이 나오는 문제들로는 길게 고민을 안하는 점에서 옆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겠네요. 편하게 생각든다니 전 오히려 영광이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 앞에 잔을 들어 그녀의 손에 감싸쥐었던 잔에 '짠'하고 부딪힌 후 혼자 또 그렇게 시원하게 원샷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는

" 아 술 잘 드셨구나. 같이 먹을 때마다 거의 잘 안드시고 그냥 들고 계셔서 이렇게 잘 드시는 줄 몰랐어요."


"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주변을 챙겨야 하면 대부분 그런 순간이니 절제를 하지만 오늘처럼 머리를 맑게 하고 싶을 때는 또 이 술만한 게 없죠. "

그렇게 말하며 이내 내 앞에 채워진 술잔을 또 다시 쭉 들이켰다. 그러자, 그제야 민경사는 마음 깊이 담긴 말을 마치 토해내듯 그렇게 나즈막히 입을 열었다.


" 늘 싹싹하고 덤벙대던 박경장이 오늘처럼 외모는 하나도 변함없는데 전혀 다른 느낌으로 곁에 있을 때 너무 낯설고 사실 두렵기까지 했어요. '같은 사람이 저렇게 까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란 생각에."


민경사는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한참을 바라보다 한모금 했다.

" 그게 사람을 많이 안겪으셔서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내 또 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냉장고로 가서 맥주캔 묶음을 더 가져 나와서는 잔을 채웠다.

" 그 존재가 외계 생명체든 사람이든. 때로는 상황에 따라 더한 경우도 더러 있어요. 어떤 때는 '어 이 사람 머지?' 하고 내가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느껴지면서 심지어 배신감과 혐오감이 들때도 있거든요."


민경사는 눈을 초롱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 하하하. 그렇다고 뭐. 엄청난 반전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저도 한때 20대 때 같이 살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었거든요. 뭐. 투자한다 어쩐다 하면서 같이 살던 방의 돈을 다 빼서 투자했다가 말아먹었죠. 그런 일을 좀 일찍 겪었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 아..."

" 전 살아오면서 그정도로 신뢰하며 누군가에게 제 미래를 건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항상 혼자라 생각해왔고 무얼 하든 치열하게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늘 곁에 사람을 둔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았죠. 아마도 제 인생에서 이렇게 흔쾌히 제가 집을 내어 드린 분은 휘우씨가 처음일 거에요."

그렇게 말한 민경사는 다소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 이곳에 와서 좋았던 건 그렇게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너무 인심 좋게 잘 해주셨고 또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셨거든요. 어디를 가든 먼저 반겨주셨고 또 살뜰히 챙겨주셔서 저도 나름은 마음을 많이 내려 놨었나 봐요. "

" 생각보다 이 곳에 외지인들이 많다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만나신 분 대부분이 고향을 벗어나 외지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이니 대부분 그런 마음에 공감하고 더 따스하게 맞아 준거죠. 저처럼. 뭐 그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다시 연이어 술잔을 비웠다.

그제야 슬슬 술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열심히 먹어 치운 안주도 바닥을 보이고 못내 아쉬워하는 내 표정을 본 민경사는 괜찮다는 내 말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을 끓여 내게 내어 주었고 나는 또 한 입에 호로록 들이키다 시피 한 후에 든든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 내일은 바쁘시겠어요? 수습하시려면?"

" 음. 원래라면 가서 보고서다 검사다 뭐 여러 일들이 산재해 있지만 지금 이순간은 그냥 잊으려구요. 휘우씨와 같이 있다보니 어느새 저도 전염되었나 봐요. 헤헤."

" 뭐 나쁘지 않아요. 내가 해결 못할 일은 빠르게 포기하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그게 인생을 좀 더 즐기며 사는 여유니까. "


어느새 민경사는 안방에 이불을 내어와 쇼파에 펼치고는

" 그럼 잠은 안방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저는 늘 쇼파에서 자던 버릇이 있어서..."

" 아 그래도 어떻게 집주인이 버젓이 있는데 객이 안방을 차지해요. 괜찮으시면 안방에서 주무세요. 제가 거실에서 자겠습니다. 저야 워낙 밖에 생활을 해와서 익숙하니까."

" 괜찮아요. 여긴 저희집이고 전 어디서 자도 편하니까. 휘우씨가 안방에서 주무시는게 더 저를 편안하게 하는 걸요. 그러니 사양 말아주세요. "




한사코 안방에서 자길 권유하는 민경사의 부탁에 결국 나는 안방 침실로 파고들었다.


언젠가 맡았던 그녀의 향기.

술기운이 잔뜩 올라 곧 쓰러질 것만 같던 몸은 축축 늘어지며 잠을 청했지만 정신은 되려 말똥말똥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새벽 녘 화장실을 가려 눈을 부비며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민경사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는 달빛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로 가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 밤공기가 찬데 왜 잠도 못자고 있어요? 그렇게 힘들때는 그냥 잠시 기대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살며시 내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턱에 머리를 기댄 채 내 몸에 등을 기대어 왔다.

" 그럼 잠시만 이대로 좀 기댈게요."

그런 민경사의 머리를 나는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 이렇게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게 참 오랜만이네요. 누군가 응원하고 곁에서 위로해준다는게 이런 기분이란 사실을 참 오랜만에 느껴봐요. 고마워요."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민경사는 눈가를 훔치며 나를 돌아봤다.


" 미안해요. 이런. 화장실 가시려던 거 아니에요?"

" 하핫. 어떻게 아셨지? 안그래도 아까부터 꽤 오래 제 인내력을 테스트 중이었습니다. 그럼 저 잠시."


나는 한계점에 도달한 내 신체반응에 잽싸게 화장실로 향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자 어느새 그녀는 쇼파에 이불을 덮은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런 그녀를 확인하고 나는 혹여 잠들려는 그녀의 선잠이 깰까 조용히 안방으로 향했다.




꽤나 상쾌한 느낌이 드는 아침이었다.

전날 술을 꽤나 마셨음에도 속쓰림 하나 없고 눈도 번쩍 떠지는 아침. 무엇보다 방안의 공기는 따스하고 은은한 향기에 마음은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서둘러 샤워를 하고 나오자 민경사는 어느새 잠에서 깨 익숙한 듯 토스트에 계란 후라이를 해서 식탁에 올려주었다.

" 아침 드셔야죠? 뭐 숙취해소용으로는 좀 그래도 빈 속보다는 나을테니."

" 아뇨. 잘먹겠습니다. 아침부터 이정도면 진수성찬이죠."

그녀가 챙겨준 아침을 먹고 나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조금 이른 시각 회사로 향했다.


어제 못한 회의 준비로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탓에 금새 그녀가 차려줬던 아침은 다 소화 되어버렸고 점심도 되기 전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혼자 점심을 나가서 먹을까 고민하다 민경사에게 해장이라도 점심시간에 같이 하자고 할까 망설이며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허사원이 보였다.


" 허사원 지금 출근해? 괜찮은 거야? 걱정했잖아. 어제는 어떻게 된거야?"

" 어머 이과장님. 저 걱정하신거에요? 호홋. 영광이네요? 다른 사람한테는 통 관심도 없던 분이 오늘은 왠일이세요?"

그렇게 말한 허사원은 어느새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려했고 나는 그런 허사원의 손을 가뿐히 뿌리치며,

" 회사에 못나오면 연락을 해야지. 도통 연락도 안되고 안오고. 당연히 같은 부서원에 책임자인데 걱정이 되지. 안그래? 무슨 일  있었어?"

" 아. 어제 몸이 많이 안좋았어요.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안좋아서 미쳐 연락도 못드렸네요. 혼자 살다 보니... 이런 건 서럽더라구요. 후훗. 이제 괜찮아요. "


내가 허사원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 눈빛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뀌려는 순간,

" 허사원. 이제 출근하는거야? 이제 몸은 괜찮아?"

김부장이었다.

"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괜찮아요. 저는 그럼 들어가 볼게요. 두분 이야기 나누세요. "


멀어지는 허사원을 바라보며 내가 김부장에게 물었다.

" 허사원 몸이 안좋았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 아 어제 늦게 허사원한테 문자왔었거든. 몸이 안좋아서 미리 연락 못했다고 오늘은 출근한다고. 미안하다고."

" 아 그랬군요."

여느 때 같으면 그런 김부장의 말에 신경도 안쓰였을 텐데. 나는 왜 의구심이 드는 걸까. 왜 미심쩍은 마음이 순간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은걸까.  왜 허사원은 늦은 밤에 나도 아니고 김부장에게 문자를 보낸 건지 박경장의 일은 알고 있는지.

대체 그녀는 박경장과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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