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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몇시쯤 끝나세요?"
얼마나 혼자 고민한지 모른다. 뭐라고 말을 할지 무엇을 먼저 물어볼지 숱하게 고민을 하며 회의자리에서 펜을 돌리다 바닥에 떨어 뜨려 이사님 눈에 들어 온 몸에 식은 땀이 들기까지 했던 오후.
발표를 마치고 긴장해서 그렇다고 말해줘 상황은 넘어갔지만 좀처럼 내 머리속에 민경사는 떨쳐내지지 않았다.
' 괜찮겠지? 별일 없겠지? 본부장이 나와 이야기 하라고 했으니 전화를 기다려야 하나? 점심은 먹었겠지?'
조용하기만 하던 내 일상에 파고든 그녀는 송두리째 고요하던 내 일상을 뒤흔들어 놨다.
오로지 일밖에 모르던 내 일상에 그녀의 존재는 마치 고요한 물 위에 던져진 조약돌 마냥 큰 파장을 일으키며 일상 속 저 밑바닥 부터 나를 흔들며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온 종일 그녀의 생각에 머리를 싸메고 있다 결국 저녁 때가 넘어 퇴근 시간이 지나고도 연락이 없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그 첫마디가 그말이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물어보는 내 말에 그녀는 조금은 당황한 듯 뜸을 들이더니,
" 아 미안해요. 오늘 제가 조금 정신이 없었어요. 후훗. 이제 마무리 하려구요. 뭐 아직 보고서 쓸게 남았는데 아직 저녁 전이라서요. 식사 하셨어요?"
" 지금이 몇시인데 아직 저녁도 안먹고 일을 해요? 당연히 저도 식사 전이죠. 같이 드실래요?"
무심결에 내뱉은 말들.
" 풉. 7시네요. 아직 퇴근 전이신가봐요? 휘우씨도?"
" 네? 아. 네. 저도 처리할 일들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모시러 갈까요?"
" 아 아뇨. 어두워서 여기 찾아 오시기 그래요. 이제 현장 근무가 아니라서요. 제가 회사로 갈게요.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 아 차도 없으신데..."
" 괜찮아요. 본부차 이용하면 되니까요. 어차피 퇴근 길에 그곳에 내려 달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제가 그리 갈게요. "
" 그럼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추위에 초조하게 손을 부비며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검은색 벤츠 차량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윽고 내앞에 멈춰서고 그녀가 내렸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기사가 내려 차문을 열려고 하자 먼저 문이 열리며 본부장이 내렸다. 나는 놀라 달려가 손을 건넸다.
" 아 이렇게 오실 줄 몰랐습니다."
" 아뇨. 아직 식전이라 들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겠네요. 퇴근길에 만나서... 뭐. 어제는 잘 쉬셨나요?"
"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서울 오시면 식사나 한끼 하시죠. 그럼 민팀장도 잘 들어가도록. 가지."
차량이 정문을 빠져나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내차로 향해 한동안 차안에 온기가 돌도록 히터를 틀어두고 앉아 있었다.
" 본부장님은 서울로 돌아가시는 가보네요?"
" 네. 어제 사실 제게 있었던 일 때문에 조금 놀라셨나봐요. 평소는 친분이 있어도 그렇게 내색하거나 오늘처럼 이렇게 데려다 주시거나 하시지 않으신데 오늘은 왠일인지 아까도 통화중에 곁에서 듣고 계시다 데려다 준다고 퇴근하라셔서 후훗. 덕분에 저도 조기 퇴근했구요. 본부장님도 일찍 서울로 돌아가셨어요. "
" 음. 그럼 내 친 김에 제가 풀 서비스 해드리죠. 뭐 드시고 싶으세요?"
" 아참. 죄송해요. 저 기다리시느라 시간이 늦어서... 8시 넘어 근처 식당은 벌써 마감이 거의 끝났을 텐데..."
바닷가 동네 특성상 인구가 적은 도시다 보니 퇴근시각을 제외하고는 거의 8시면 식당이 문을 닫았고 남은 가게는 김밥집 아니면 술집이었다.
" 음 그럼 저희 마트 갈까요? 저 나름 요리 잘 합니다. 자취 생활 거의 20년이라.."
" 네? 그런 걸 한국에서는 자취생활이라고 해요? 풉."
" 뭐. 본의 아니게 혼자 살며 요리해 먹으면 그게 자취죠. 벌거 있나요? 가시죠. 메뉴만 정하심 어떤 요리든 가능하죠. "
그렇게 우리는 근처 마트로 향해 약간의 야채와 스파게티 면과 샐러드 재료를 사서 시우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소고기 살치살을 버터에 구워 샐러드 접시에 함께 올리고 스파게티 면을 데쳐서는 올리브 유에 달달 볶아서 잘 만들어 나온 크림 소스를 듬뿍 얹어서는 마치 내가 만든 것 마냥 멋들어지게 내었고 그녀는 방긋 웃으며 한 젓가락 뜨더니,
" 후훗. 전문점 못지 않은 솜씨신데요? 한국은 이런 게 잘되어 있군요? 누가 보면 진짜 직접 다 만드신 줄 알겠어요. "
" 뭐. 제 노력 더 했으니 제가 한거나 마찬가지죠. 어때요 드실만해요?"
" 네. 제법 먹을 만해요. "
" 이런 때는 와인이 제 맛인데 조금 아쉽네요. "
" 그러게요. 음. 그럼 와인 대신 야경이라도 구경 가실래요? "
" 야경요?"
" 음. 이곳이 외진 곳이긴 해도 야경 멋진 곳이 제법 있습니다. "
" 그럼 소화도 시킬겸 나가볼까요?"
그렇게 우리는 함께 차를 몰아 은어 다리로 향했다.
색색의 조명이 들어온 긴 다리 위로 마주보며 이어진 물고기 문양의 갈비뼈 사이를 거닐며 제법 쌀쌀히 부는 찬바람은 그녀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고 나는 이내 아침에 챙겨들었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나름 지난 캠핑장에서 그녀가 추위에 약한 모습이 기억나 언젠가 입을지 몰라 차에 잽싸게 챙겨둔 것이었다.
" 추위를 제법 타시나봐요? 휘우씨?"
" 아 바닷가 살다보니 언제 추워질지 몰라서 항상 차에 두고 다녔어요. "
" 휘우씨는 어떤 때보면 되게 관찰력이나 준비성이 철저하신 분인데 어떤 때 보면 그런 면과 달리 참 여유로운 면이 보여요. 보통 그런 분들은 항상 긴장하며 초조해 하시던데. 의외에요. "
" 뭐. 그런 면에서 서우씨도 못지 않죠. 사람에게 관심없다하시면서도 잘 관찰하시고 다른 점을 잘 잡아내시니까요."
" 제게 그런 면도 있었나요?"
" 그러니까요. 그래서 박경장도.. 아참.."
" 아.. 괜찮아요. 말씀하셔도."
" 아 박경장 일은 잘 마무리 되셨어요?"
" 음. 박경장은 결국 오늘 사망했어요. 심정지가 와서. "
" 그럼 상가집이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일단은 부검을 해야해서 본부에서 데려갔어요. 가족들에게 동의도 받고 절차도 있고 상황이 기밀이라 좀 복잡하다 보니... 그렇죠. "
" 아 그래서 정신이 없으셨구나. 아참 서우씨는 괜찮으신거에요? 어제 그 박경장과 접촉..."
" 안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늘 저도 각종 검사를 받고 했는데 별 다른 이상은 없었어요. 워낙 제가 본능적으로 대응하기도 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만 박경장의 손이 머리에 닿았을 때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서 순간 나도 모르게 내동댕이쳤는데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오늘 보니 제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기분이 좀 뭐랄까 묘하다고 해야하나... 그런 거 같아요. 그냥. 기분 탓 때문일 수도 있구."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민경사와 지금의 민경사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처음의 그 사무적이고 다소 격식에 젖어 있던 그녀와 달리 지금의 그녀는 그저 인간적인 모습. 아니면 내가 그녀를 너무 사적으로 느껴 그런가. 나는 문득 궁금했다.
" 어떻게 다른데요?"
" 음 기분이 평소와 조금 달라요. 슬프기도 하고 조금 공허하기도 하고... 좀 복잡해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랄까요? 사실 이런 감정은 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못느끼며 지냈거든요. 오히려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도 담담히 예상했던 결과처럼 느껴져서 마치 사명감에 불타 무엇인가 집착하듯 악착같은 마음이 더 들었었는데... "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다리끝에 닿아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은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으로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며,
" 날이 추운데 미안해요. 제가 기분 내자고 데리고 나와서는 되려 더 힘들게 한거 같아요. 추운데 따스한 커피라도 한잔하러 가시죠."
차를 몰아 해안 도로를 달리다 보이는 카페에 들러 창가에 자리를 잡고는 따스한 카페라떼와 크림라떼를 주문하고는 한입 마셨다.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추위는 언제 그랬냐듯 눈 녹듯 사라졌다.
" 캠핑카에는 안가보셔도 되요?"
" 뭐 그녀석은 저 없어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 보시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홈캠을 보여줬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말똥거리며 내 손에 올려진 핸드폰 속 화면으로 보이는 홈캠 화면을 돌려가며 내 캠핑카 내부를 열심히 들여다 봤다.
" 어머 이런 것도 있으셨어요?"
" 뭐. 나름 저의 자산 아닌 자산이다 보니 지킬 건 지켜야죠. "
" 날이 갈수록 세상이 좋아지는 건 확실한 거 같아요. 이런 것 보면. 그런데 이런 걸 여기도 설치 할 수 있어요?"
" 음 약간의 편법과 기술이 필요하죠? 하하. 자세한 건 비밀이구요. "
" 가끔 보면 남자들 세상은 여자들이 아는 세상과 참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때가 있어요. "
" 어떤 면에서요?"
" 그냥 뭐. 관심사도 그렇고 바라보는 것도 특히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보면 그래요. "
" 음. 전 가끔 여자들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던데. 그래서 아예 관심을 안가지려 하는데."
" 이과장님이요? 음. 그러고 보니 이과장님은 좀 여자들한테 관심이 없는 듯 보였어요. 의외로 섬세하신데 말이죠. 그건 아마 집중도의 차이이지 않을까요? 한가지에만 집중하려는 습성 때문에?"
" 그런가요? "
" 여자들은 여러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 살피려 드는 습성이 있는 반면에 남자들은 보통 보면 한 가지일에 몰두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파고드는 부분이 있다고 해야하나. 특히 이과장님은 그런 부분이 좀 강하신 거 같아요. 길게 본건 아니지만. "
" 생각해 보니 제가 조금 그렇죠. 그래서 주변에 관심을 안가지려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무관심해지는 것 같아요. "
나는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쩌면 그런 내 습성으로 인해 나는 그렇게 아내를 떠나 보낸 건지도 모른다.
내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젖어 그것이 마치 내 가정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당연한 결과인양 생각하며 하루쯤 긴급 상황이라도 내 가정의 긴급 상황이 더 우선임을 나는 간과하며 그렇게 사소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 직면했는지 나는 가늠도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도 그다지 나는 그녀가 아니기에 그녀의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하는 지는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같다.
적어도 내 가정이 먼저이고 내가 먼저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