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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ny Nov 25. 2017

영감(靈感)의 원천

미국 내 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A는 인디애나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나 가깝게 지냈던 후배였다. 워낙 붙임성이 있는 데다가 공통 관심사도 많은 편이었어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10년 전쯤 학업을 위해 동부에 잠시 거주했던 A를 만나기 위해 그가 공부하고 있는 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집 앞에 세워둔 A의 자동차 뒷자리에 굴러 다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마치 라면 국물을 쏟은 뒤 그대로 말린 듯 뒤틀려져 있었고 흰색 표지는 햇볕을 받아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모름지기 책꽂이에 잘못 세워둔 채 조금만 지나도 금방 형체가 변하는 게 책이건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팽개쳐져 있었길래 그 모양이 되었겠나 생각했다. 


임종을 앞둔 고 김치영 목사의 4개월 간의 병상 대화를 아들의 눈으로 기록한 김동건 교수의 저서 ‘빛 색깔 공기’에는 아버지의 유별난 책 사랑이 소개된다. 평생 목회자로 살아왔던 김목사가 구입한 장서로 꾸며진 서재는 대단했다. 교수인 아들 역시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김 목사는 책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며 그의 서재를 가장 특별한 공간으로 생각했다. 반면 소설가 김훈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책이 쌓여 있을 것 같지만, 정작 애착이 없다고 말한다.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에게는 전등과 곡괭이면 충분하듯, 때마다 필요한 책과 자료만 구해 보고 곧바로 없애버린다는 그의 답변의 의외였다. 그나마 집에 남아있는 적은 수의 책들은 수없이 읽어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될 만큼 소화를 시킨 것들이라고 한다.


십수 년 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연주했던 적이 있다. 이때 사용했던 스코어(총보)는 이 곡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부터 적어둔 중요한 내용들이 차곡차곡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어 가사와 대사들의 의미를 깨알 같은 글씨로 번역 내용을 옮겨 적었고,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따로 표시해둔 중요한 내용들도 잘 정리된 보물 같은 악보였다. 연주를 잘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얼마 후, 그 곡을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할 기회가 생겼다. 다시 악보를 꺼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짬짬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가방이 분실되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도둑은 가방 속 랩탑을 노렸겠지만, 정작 가방 주인의 진짜 보물은 마술피리 스코어였다. 도둑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악보를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악보를 찾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A의 차 뒷유리창에 팽개쳐 누렇게 널브러져 있던 그 불쌍한 녀석이 다름 아닌 필자가 책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단돈 10 달러면 살 수 있는 단행본이었지만 밑줄을 그어가며 가슴에 새기며 많은 배움을 갖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그래서 추천했고 내손으로 내어준 책이었는데 특별했던 그 녀석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 날 이후로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되, 누가 무슨 책을 언제 빌려갔는지 기록해두고 꼭 돌려받는 버릇이 생겼다. 북가주에 사는 한 독서광인 지인은 선물하는 심정으로 책을 빌려준다고 했다. 내 서재를 떠난 책은 내 책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이다.


음악가에게 악보는 책 이상의 의미이다. 행여나 빌려준 악보가 손상되거나 분실되면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다. 헌책방에 가끔씩 등장하는 악보들을 뒤적일 때마다 이 녀석은 왜 주인을 떠나 이곳에 와있을지 상상하면 괜히 아련해진다. 그래서인지 악보 중간중간 발견되는 무심해 보이는 손글씨와 표시들이 묵직한 의미로 다가온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 교수가 책을 통해 저자와 대화한다고 했던 것처럼 음악가에게 악보란 그런 존재다. 필자의 방 한쪽 벽에는 악보들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악보는 작곡가를 만나는 장이자, 교훈을 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결국 역사 속에 묻힌 그들을 오늘로 불러내는 유일무이한 통로이다. 둘도 없는 영감(靈感)의 원천이요 보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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