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나라를 구한 자'의 오글거리지만 떳떳한 사랑 자랑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강렬한 소망도 함께 찾아왔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무언가 모를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 들어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땐 그 소원이 정말 간절했었다. 커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소원도 아녔으며 좋은 성적을 받아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소원도 아니었고, 심지어 이쁜 여자친구가 생기길 바라는 소원도 아닌 진실한 사랑을 찾길 원하는 소원이라니 지금 생각하니 어찌 보면 시쳇말로 하는 중2병이 아녔는가 싶지만 하루에도 한두 번씩 끊임없이 10여 년을 혼자 되뇌었으니 그땐 정말 진심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진실된 사랑에 대한 집착의 원인을 고민해봤던 적이 있었다. 10대 때 살던 집에는 둘째 누나의 방이 따로 있었다. 5남매의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집에서 혼자만의 방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5남매 중 유독 강렬한 사춘기 시절을 겪었던 둘째 누나를 위해 아버지가 특별하게 누나 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 솔직히 정확히 말하자면 방이라고 말하기엔 2% 부족했다. 보일러실 뒤쪽 공간을 막아 방을 만들어 주셨는데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겨울에는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하는 방이다 보니,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아지트 느낌이 더 강한 공간이었다. 누나의 방이었지만 그 시절 대학생이던 누나는 자신의 방보다 집 밖을 더 좋아했었기에 그 방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의 비디오방으로 변해 있었다. 정말이지 영화 감상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한참 사춘기가 발현되려 꿈틀 되던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인지 대략적인 기억뿐이지만, 왜 영화를 보러 갔는지도 기억 이나지 않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있다. ‘마르크 카로’와 ‘장 삐에르 주네’가 연출한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라는 영화이다. 추운 겨울 장판 하나에 의지해 차가운 공기 때문에 코가 빨개져 가면서도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가 끝났을 땐 그 영화의 여운 때문에 한동안 가만히 멍하니 치직 거리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화면을 쳐다보았었다. 매번 누나들이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영화인지 어떤 내용인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같이 영화를 보았었다. 어린 나에겐 아마 누나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에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의미를 더욱 두었었다. 그렇게 한 번도 혼자 영화를 본다는 행위를 생각 한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아지트 같은 누나 방문을 열었고, 수십 개의 그 많은 비디오테이프 중에서 우연처럼 운명처럼 인생의 영화를 만나 영화에 빠지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예술영화와 고전 책들 만을 고집하며 중2 겨울방학에 중2병에 입문하게 되었다.
‘좁은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인 ‘앙드레 지드’가 했던
“거짓된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진실된 모습으로 버림받는 것이 낫다”
라는 말에 꽂혀 20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사랑의 좌우명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그리고, 우연히 미술을 접하다 알게 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인 잔느 에뷔테른’
의 사랑이야기에 감동을 넘어 그들의 사랑을 동경하며 그런 사랑을 찾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속에 심어져 꿈틀거림을 느꼈었다. 아마도 영화와 책들에 영향을 받으며 그렇게 영화와 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상향적인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조금씩 사랑에 대한 가치관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으며 빛이 조금씩 바래갔지만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천운으로 지금 아내를 만났다. 많은 연인들이 운명처럼 사랑을 만났듯 우리 역시 그렇게 많은 우연과 운명이 겹쳐 만나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게도 처음부터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았었다. 이 세상에 소울메이트가 있다면 바로 아내라고 확실할 만큼 우리는 서로가 닮아있다 생각했었기에 서울과 대구 사이의 2년간의 장거리 연애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잦은 다툼이 발생한다던 커플들의 난코스인 결혼식까지 사귀는 동안 한 번도 큰 다툼 없이 사랑을 이어갔었다. 그런데 같이 살아가면서 딱 맞춰져 있다고 믿었던 합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데칼코마니라 생각했던 아내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세컨드 임팩트’ 수준으로 나의 AT필드를 뒤흔들었고 순순히 인정하며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었다. 어떻게 보면 그 시기 우리는 가장 치열한 전투적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지친 심신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상대에게 배려를 갈구하기만 했던 시기였었다. 배려를 배제한 서로의 진실된 본성을 마주한 순간 그 당혹감은 기대에 한껏 부풀어 나간 소개팅에서 옛 여자친구를 다시 조우한 당혹감보다 더 했었다. 그것도 막장드라마를 찍으며 헤어진 옛 여자 친구와 말이다. 하지만 폭풍의 시절이 시간과 함께 지나가고 나서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하니 아내와의 다름은 이상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것 이었다. 30년 가까이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살아왔는데, 그것도 동성이 아닌 이성이 어찌 똑같은 사고와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솔직히 똑같다면 둘 중 하나는 클론이거나 어릴 적 헤어진 쌍둥이 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막장드라마를 찍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서 부부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맞벌이의 생활을 한다면, 생각보다는 많은 시간을 같이 할 수는 없다. 아침에는 출근하느라 바쁘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씻고 자기 바쁘다. 하루에 얼굴을 보며 진지한 대화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거기에 주말 역시 일주일간 처절한 직장 전투에서 쌓인 피로로 인해 방전되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기 바쁘고, 그 널브러짐 조차 수많은 경조사로 인해 잘 허락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패턴으로 살아가다 보니 부부라 할지라도 어찌 보면 남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맞벌이 부부로 한국에서 살아가다 여행을 떠나니 이야기가 180도 확 달라졌다. 24시간을 2년 반을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보니 그 사람의 바탕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그동안 숨겨져 있던 많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진짜 알맹이의 상대방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서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가 다름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진실된 마인드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결론은 아내와 나는 똑같은 베이스를 가지고 있지만, 30년간 살아오며 각자의 생활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의 블록이 베이스 위에 쌓이게 되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같이 행복을 나누어갈 사랑으로써 필요한 건 데칼코마니의 똑같은 모양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인정해 주고 사랑해주는 것이란 걸 배우게 되었다. 서로가 다른 조각이어서 그 홈이 딱 맞는 조각일 필요가 없이, 각자 완벽한 도형 둘이 만나 같이 동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진정한 사랑이란 내가 무엇을 해도 상대방이 끝까지 나를 믿어주며 아낌없이 나에게 퍼부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생각인가. 책과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호도하고 겉 보습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그것을 본질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요즘 가끔 우스개 소리로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유 인즉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년 이상의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남편을 따라 선 듯 여행을 따라나서고, 남편의 도전을 위해 자신이 먼저 취업을 하여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 주고, 아기가 생겨 가장의 책임감으로 출근을 하려는 남편에게 “내가 오빠에게 바라는 건 돈을 벌어 오는 게 아니야. 돈은 내가 벌고 있으니 괜찮아”라는 진심 어린 말로 당장의 돈벌이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주는 아내를 보고 있자면 진심으로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해주고 믿어주는 관계. 취미를 공유하고 예술과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부터 종교 에이르기까지 심도 있는 토론이 가능한 관계.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고 자극이 되어주는 관계. 상대방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는 관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관계가 얉아지는것이 아니라 더욱 돈독 해지는 사랑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진정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동감하는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극히 주관적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현재로썬 앞으로도 이 생각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기에,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부터 생각해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기에 앞서 무언가를 해줄 것인가 보다 무언가를 받기를 원한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기에 수익을 따질 필요가 없으며, 경쟁 또한 아니기에 상대를 이기려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자기만족을 위해 연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간혹 연인에게서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이렇게 해주겠지"라는 바람이 관계에, 사랑에 틈을 만들어 갈지 모른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사랑이 어렵겠지만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 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된 사랑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보면 현실사회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된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분류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