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조합, 난 후무스 당근 라페 그리고 두부
요가와 책 그리고 언어 공부.
어딘가 너무 올바르기만 할 것 같은 이 조합은 베스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어쩐지 첫 만남부터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가면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던 도서관도 베스와 함께 갔을 때는 마치 분신술을 한 느낌이었다. 어찌나 취향의 결도 비슷한 건지, 내가 고른 책이 네가 고른 책이고 네가 고른 책이 내가 고른 책 같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도서관을 왔을 때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그렇게 서로의 교집합을 확인한 우리는 함께 더 많은 것을 하기로 했다. 베스는 먼저 요가원에 함께 다니자고 제안해주었고,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필라테스를 결제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의 충동성도 교집합 중 하나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수요일마다 함께 운동까지 하게 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가 해 먹을 요리는 사실 조금 어이없게 정해졌다.
베스는 원어민 교사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근데 베스의 옆집에 사는 친구가 이사를 가며 이것저것 베스에게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채 써는 기구였다. 베스는 나에게 필요하면 이 채 써는 기구를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 도구가 생긴 김에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메뉴를 시도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근 라페를 하게 되었다.
베스는 배가 고팠는지 갑자기 재료를 은근슬쩍 주워 먹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요리할 때는 뭔가를 집어먹는 재미지! 베스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부엌 안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바로 땅콩버터였다.
그리고는 사과에 땅콩버터를 한가득 얹어서 와앙! 당근에도 한가득 올려서 와앙!
"으음, 역시 땅콩버터는 만능이야!"
라면서 베스는 나에게도 땅콩버터가 듬뿍 올려진 당근과 사과를 건네줬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라 그 맛을 의심하며 입에 집어넣었는데, 예상외로 꽤 괜찮은 조합이었다. 특히 땅콩버터와 당근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하기야 예전에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일본에서 논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술에 취해서 바나나를 껍질 채 땅콩버터와 먹는 것을 봤다. 그 장면을 보고 정말 충격을 먹었다. 일단 당연하게도 바나나를 껍질채 먹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고, 땅콩버터를 그 위에 발라 먹는 것을 보며 '얘가 술에 많이 취했구나.' 싶었다.
그동안 나는 그때 일어났던 일들이 그냥 술에 취해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근데 다시 한번 미국인 친구인 베스가 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베스는 저번 친구와 다르게(?)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닌 믿음직한 상태였기에 베스가 미국에서 어떤 음식이든지 땅콩버터를 올려먹는다는 말을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이건 마치.. 한국인이 뭐든지 튀겨먹는 그런 느낌이려나? 하긴 베스도 처음 가지 튀김을 할 때 적잖이 놀라긴 했으니까..! '튀기면 신발이라도 맛있어'라는 말처럼 나는 튀부심이 엄청나기 때문에 베스가 땅콩버터가 만능 식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튀김과 땅콩버터.
어쩌면 이들은 너무 올바른 취미(?)만 갖고 있는 우리의 작은 일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완성한 당근 라페와 두부튀김. 그리고 내가 제주에서 제일 애정 하는 식당에서 사 온 후무스와 난. 그리고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대추야자열매와 와인까지! 아주 난잡한 한상이 완성되었다.
사실 음식들이 조화로운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이 넓고 광활한 우주에서 그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 중에 너와 내가 만나서 이 순간, 이곳에서 같은 음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 이 난잡한 조합을 함께 쿡쿡 웃으며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이런 교집합들이 나는 좋았다.
당근 라페 레시피
[재료] 당근 1개, 사과 반개, 올리브 오일 2 숟가락, 레몬 반 개, 메이플 시럽 1작은술, 소금 2꼬집, 후추 약간, 홀그레인 머스터드 1 티스푼
1. 당근과 사과를 얇게 채 썬다.
2. 드레싱 만든다.
3. 채 썬 당근과 소스를 섞는다.
* 당근 라페 레시피 출처 : 베지곰(에서 입맛대로 바꾼 레시피)
* 난과 후무스를 산 곳 : 제주도 와르다 레스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