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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헌 Dec 03. 2018

세 갈래 길
- 시련과 삶의 주체성 -

주어지지 않은 삶을 쟁취하는 법


주제 : 삶의 행복 / 작품 : 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여유로운 일요일에서 나눈 대화를 소재로 쓴 글입니다.




모든 여자들의 삶



이 책은 현대 인간 사회에서 여성들이 살아가게 되는 세 가지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미타, 줄리아, 사라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하층민, 중류층, 상류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각각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스미타는 인도의 불가촉천민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심지어 남편까지도 놔두고 말입니다. 줄리아는 이탈리아 머리카락 공방을 소유한 집안의 딸입니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벌이지는 일을 겪습니다. 사라는 캐나다의 잘 나가는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입니다. 그녀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놓지 않기 위한 투쟁을 합니다. 이 세 여자들은 육아, 사랑, 커리어라는 여성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남성의 삶에서도 중요하지만)것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편견과 차별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지위도 인종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결국 이 세 명의 여자들은 한 가지로 묶이게 됩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받아야 하는 차별과 편견들입니다.




불가촉천민이라 눈도 마주치는 것을 불결해하면서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무참히 강간을 합니다. 그리고 강간을 당하는 사람이 오히려 죄인이 됩니다. 형벌로써 그들은 여자들에게 강간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미타는 자신의 딸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과감히 자신의 집을 떠납니다. 잡히면 엄청난 지옥이 펼쳐질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주체성에서 남성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죠. 스미타는 그러한 곳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감당해내고 있습니다.




결혼으로 자신의 빚을 갚아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할까요? 줄리아는 자신의 집이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다른 인종에 다른 종교)과 돈 많은 사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지만 그 선택에도 망설임은 있었습니다. 주위의 환경은 그녀가 그녀의 사랑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죠. 그런 가운데 그녀는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내기로 결심합니다.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죠. 이것 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주위의 시선과 만류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사라는 언뜻 보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녀도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와 파트너 변호사로서의 자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녀는 암에 걸렸다는 판정까지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회사는 그녀를 철저히 배제하죠. 사회적인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입니다. 그녀의 삶이 행복할까라는 것과는 별개로 너무 많은 것을 견뎌야 하는 그녀의 삶을 보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시련이 주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련과 삶의 주체성



이 주인공들이 자신의 삶에서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주인이었다는 것은 확신합니다. 외부에서 시련이 왔을 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그 시련과 부딪힙니다. 그것을 깨버리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세 주인공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시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순응하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그것에 저항하고 개척하는 삶을 살 것이냐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저항하는 삶은 순탄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개인은 너무 약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의 삶에서 희망을 보는 까닭은 그것을 견디고 나아갔을 때 더 나은 삶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에 주어지지 않은 삶, 자신의 아이를 잘 키우고, 이루기 힘든 사랑을 하고, 사회적인 압력을 깨는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막고 있는 것을 부숴야겠지요. 그런 삶을 위해서 이들은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수많은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그들은 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더 비참한 것은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에 저항하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지만, 삶의 주체성은 저항할 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내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강인함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세 주인공이 바라는 삶은 주체적이지 않으면 결코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삶입니다. 이들은 시련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녀들을 덮친(?) 위기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시련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큰 시련에 맞서야 하죠. 그렇지만, 그들은 맞서는 것을 선택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삶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들의 삶이 꼭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련을 꼭 감당해야 하는 것도, 굳이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이 행운처럼 그냥 주어질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투쟁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요.


행복을 위해서 때로는 시련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도 방법입니다. 어쩌면 투쟁은 더 큰 상처를 우리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드시, 그 투쟁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지금의 삶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주인으로써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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