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영어 선생님
은수는 내가 2학년 때 담임을 맡아 가르쳤던 아이다. 은수는 장난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종종 하곤 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방과 후 시간에 5학년 형아의 신발을 몰래 다른 곳에 숨겨놓는다거나, 남들이 보건 말건 바지를 내리고 1층 화단에 쉬를 갈겨버린다거나, 뱅글뱅글 돌면서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턱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게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었다. 이때의 나는 “선생님 은수가요...”라는 말을 매일 같이 들어야 했고 은수의 새롭고 충격적인 행동에 매번 놀라는 게 일상이었다.
은수의 행동은 비겁했다. 2학년이 5학년 형아의 신발을 숨긴 건, 그 정도의 장난을 칠만큼 둘 사이가 친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5학년 형아를 무서워하지 않고 장난을 칠만큼 은수가 대범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5학년 아이는 특수아동이었고 신발이 없어져서 울고 화내고 당황하는 모습이 남들과 달랐다. 은수는 그 모습이 재밌어서 그런 거였다. 한 번도 아니고 셀 수 없이 많이, 여러 번.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올해, 은수를 다시 만났다. 영어를 가르친다던 은수의 부모님 덕분에 은수는 해외 어학연수도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하지만 은수는 A부터 Z까지 대문자와 소문자를 아직 다 외우지 못했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곤 했다.
“Science는 과학이라는 뜻이에요. 발음할 때 S 소리만 난다고 C를 빼먹을 수 있으니까. C가 있다는 걸 기억해 두세요.”
“선생님, 초싸이언의 싸이언 맞죠? 그럼 초싸이언은 무슨 뜻이에요?”
“싸이언과 싸이언스는 다르지. 그건 만화 속 등장인물이잖아.”
“아닌데, 싸이언이 그 싸이언 맞는데.”
자기가 아는 게 정답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학원에서 배웠거나 유튜브에서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도 어쩌나, 다른 건 다른 거고 틀린 건 틀린 거라고 가르쳐야지.
3년 전 담임이어서 나를 좀 더 편하게 여긴 걸까.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은수는 담임 선생님 시간보다 내 시간에 좀 더 장난을 많이 친다고 했다(은수를 떠나서 담임 시간보다 교과 전담시간에 아이들이 좀 더 말을 안 듣는 것 같긴 하다). 오늘 배운 단어를 2번씩 쓰고 확인을 받은 뒤, 블루킷에 접속하도록 안내했다. 은수가 다했다고 손을 들어가보니, 오른쪽 단어가 텅 비어 있었다.
“은수야 이 쪽은 안 했네. 다 쓰고 다시 확인받아.”
“여기 했잖아요!”
은수는 날카롭게 말을 내뱉고는 학습지를 쓱 뒤집더니, 책상 위에 쾅! 내려놨다. 학습지 뒷 면의 하얀 종이에 단어가 적혀 있었다. 나는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뒷 장에 했으면 뒷 면을 보여줬어야지. 선생님은 네가 뒤에 적은 걸 모르잖아.”
“쌤이 봤어야죠.”
“...”
‘하느님,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종교도 없지만, 잠시 하느님께 의지했다.
‘부처님, 다음 생에는 부디 은수가 선생님이 되게 하여 그와 같은 인간을 학생으로 만나게 하옵시고’
줏대 없이 부처님께도 소원을 빌었다.
찰나의 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멈췄다.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 중에 가장 낮고 무겁고 냉기를 담은 음색으로 가라앉힌 뒤, 은수에게 말했다.
“은수야, 이런 행동을 사(숫자 4의 발음으로 말하며) 가지가 없다고 하는 거야. 선생님은 네가 다른 선생님에게 혹은 다른 어른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할까 봐 걱정이 돼. 네가 뒷장에 단어를 썼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 너만 아는 걸 아무 설명 없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파악하지? 특히 방금 네가 한 말은 대화가 아니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교실 속 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졌다. 은수는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업은 마무리 됐다.
다음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옆 반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그리곤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쫑알쫑알 내게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 은수한테 싸가지 없다고 말했어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느라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그냥 도장이나 찍어주고 말 걸 그랬나?
이거 아동학대인 건가?
요즘 시대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잔소리를 했을까.
과거의 나를 탓하다가 입을 열었다.
“은수보고 싸가지 없다고 한 게 아니라, 은수가 한 말이 싸가지 없는 행동이라고 알려준 것뿐이야. 나쁜 행동은 나쁘다고 알려줘야지.”
말이야 방구야.
말이든 방구든 은수 부모님한테 전화 오면 최선을 다해 방구를 뀔 테다. 방구도 용기 있는 자가 뀌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