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 한 너와 톡 쏘는 너
“엄마 저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잠에서 일어난 아이가 눈을 비비며 말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까? 신기한 꿈이라도 꾼 거야?”
궁금한 내가 아이를 안아 올리며 물었다.
이제 여덟 살이지만 언제나 우리 집 막내인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내 가슴에 파고든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나를 세워놓고 거실 끝으로 가서 달려와 안기는 퍼포먼스를 하곤 한다.
들어 올리기엔 이제 힘이 부치지만 여전히 안고 있음 애기 냄새가 난다.
착 감기는 그 촉감이 무척 사랑스럽다.
존댓말까지 하는 걸 보니 낯선 경험을 한 것 같다.
“분명히 밤에 내가 눈을 감았는데 1초 만에 아침이 되었어요. 따뜻한 햇살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 ‘꿀잠’을 잤다는 말인가 보다.
달콤한 잠을 자고 난 녀석의 표정이 아쉽지만 만족한 듯하다.
나는 아이의 말이 더 꿀맛같이 느껴진다.
“그랬구나. 피곤했나 보다. 잘 잤구나!”
첫째를 키울 때도 그랬다.
아이가 하는 말들은 때로는 말처럼 때로는 노래처럼 심지어 ‘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을 텐데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걸까?
아이들 눈에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둘째 녀석의 ‘아기’스러움에 마음까지 힐링되는 기분이다.
한 때는 둘째 녀석 같았던 큰 아이는 논쟁을 찾는 ‘하이에나’ 같다.
아니 이 녀석은 ‘스토리 메이커(story maker)’다.
장면 하나에 말도 안 되는 살을 붙여가며 이야기를 뚝딱뚝딱 잘 만들어낸다.
끝이 없는 이야기꾼이다.
아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만들어질수록 더 신이 난다.
오늘 안에 안 끝날 기세다.
이때 내가 쓰는 ‘필살기’가 있다.
“지금부터는 영어로 말해봐.”
몇 마디쯤 더 말하다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어법에 상관없이 계속될 때가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야기를 끝내면 난 쉴 수 있어 좋고, 계속하면 아이가 영어 말하기 연습이 되니 좋다.
상황극 재현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뜬금없이 며칠 전 본 TV 프로그램 장면을 재현한다.
여자가 말한다.(아이가 말한다) “전 수학 싫어했어요.”
남자가 대꾸한다.(내가 말한다) “저도 수학 안 좋아했어요.”
반가운 여자(아이)가 묻는다 “언제 수학 포기했어요?”
남자(내)가 쳐다보며 말한다. “포기는 안 했는데…”
뚱한 표정의 여자(아이)가 말한다. “난 X가 나올 때 포기했어요. 왜 영어가 수학에 나오냐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극에서 큰 녀석이 묻는다.
“엄마 수학에 X가 왜 나와?”
“그게 방정식인데, 미지수를 물어보는 거 거든. X+10=20이다. X는 얼마인가? 뭐 대충 이런 거야. 초등학교 때도 배우고 있잖아. □+10=20이다. □는 얼마인가? 이런 것. 그래서 수학 공부는 지금부터 신경 써서 해야 해. 다 연계되어 있거든.”
여기서 아이의 반격이 시작된다.
“수학만 연계되어 있습니까? 모든 과목이 다 그렇지. 왜 수학만 더 열심히 해야 합니까?”
“기초가 약하면 다음 단계를 풀 수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수학은 선행보다 현행, 심화가 중요한 과목이라잖아.”
“나중에 잘할 수도 있지 않나요?”
“기초가 없는데 어떻게 나중에 잘해?”
“그렇게 따지면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어도 글씨를 알아야 책을 읽고 책을 읽어야 문맥을 이해하고, 영어는 안 그렇습니까? 알파벳을 알아야 읽을 수 있고…..”
이쯤 되면 정리를 해야 한다.
내가 완벽하게 요 녀석을 수긍시킬 수 없다면 기권하는 수밖에.
“맞네. 네 말이. 그럼 전 과목 다 열심히 하는 걸로. OK?”
“그렇죠. 다 열심히 해야 하는 거죠. 수학만 편애하면 안 되죠.”
녀석이 만족한 듯 자리를 뜬다.
능글맞게 구는 이 녀석도 “우리나라에 육군 말고 또 뭐가 있죠?”라고 물었을 때
“저요! 칠군, 팔군요!”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이 제법 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