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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Sep 22. 2021

길들여지는 것에 대하여

나 또는 네가 서로를 닮아가듯 살아간다



# 그 여자에게 길들여가다...


오랜만에 마라탕(麻辣烫)을 먹었다.

알싸한 마라와 갖은 채소가 어우러진 얼큰한 국물을 나는 참 좋아한다.

중국어를 전공한 나에게 마라탕은 일종의 김치찌개 같은 느낌이다.

특히 비가 오거나 날씨가 쌀쌀해질 때면 더욱 생각나곤 한다.

훠궈(火锅)도 좋아하는데 우리 집에는 이런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매워서 먹지 못하고 그나마 어른인 남편은 마라의 매운맛이 싫다고 한다.


그런 그와 오늘 점심으로 마라탕을 먹었다.

남편과 평일 점심 외식은 흔치 않은 이벤트이다.

게다가 메뉴가 마라탕이라니, 꽤 황송한 일이다.


나를 위한 그의 희생인가 싶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본인도 이제 조금씩 마라탕이 맛있어진다고 한다.

이것이다! 마라탕은 원래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무슨 맛에 먹지 싶다가 조금씩 먹다 보면 어느새 한 번씩 생각나는 그런 맛이 된다.

이렇게 길들여진 맛은 평생 끊을 수 없다.


우리 부부는 참 다르다.

입맛, 온도, 취향, 취미까지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지낸다.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길들여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겨우 마라탕 하나에 어린 왕자까지 소환한 것이 민망하지만,

문득 마라탕을 먹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마라탕을 먹고 있는 그를 보며

우리는 여전히 길들여지고 있는 중이라고.




# 그 남자에게 길들여가다...


날씨가 다 했다고 할 정도로 날씨가 좋다.

이번 주는 캠핑이다.

큰 애가 4살이 되는 해 시작한 캠핑은 그의 로망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공통’의 취미가 되었다.

둘째는 100일이 지나면서부터 캠핑을 시작했으니

캠핑과 인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는 캠핑을 좋아하지 않았다.

벌레도 많고 씻기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편하지 않은 그런 ‘행위’를 왜 하는지,

캠핑을 가기 전부터 스트레스가 말도 못 했다.

캠핑을 와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남편이 하지만,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시작되었다.


그런 '스트레스 캠핑'이 신기하게도

둘째가 기저귀를 떼면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석쇠에 굽는 고기는 별미 중 별미였고,

모닥불 앞에 두고 홀짝홀짝 마시는 술은 종류를 불문하고 취하지 않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새벽같이 깼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정신이 맑다.

풀냄새와 그 전날 타버리고 남은 재 냄새가 섞여

시골냄새 풍기는 아침에 커피 향을 더하면 여기가 천국이지 싶다.



간식으로 먹는 떡볶이나

야식으로 끓여 먹는 라면은

경쟁이라도 하듯 젓가락을 바삐 움직인다.

도란도란 남편과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또 어느새 각자 멍하니 모닥불을 보고 있으면

무념무상, 세상 근심 걱정 한 순간에 사라진다.

이곳이 무릉도원이고 천국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도 제법 캠퍼 경력이 쌓이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각자의 역할을 해낸다.

아빠가 쳐 놓은 텐트 둘레를 돌며 꼼꼼하게 망치질을 하는 것도,

숯에 토치를 사용해 불씨를 살리는 것도,

장작 쌓고, 나뭇잎 주워 오는 것도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


엄마 아빠 술 한잔 기울일 때

녀석들은 모닥불 꺼지지 않도록 알아서 착착 장작도 넣어준다.

모닥불에 구워 먹는 달콤한 마시멜로는 늦은 밤 커피까지 소환한다.

달콤한 마시멜로와 쓴 커피가 어우러져 동공 열리는 맛을 만들어낸다.


활활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모닥불처럼

진저리 치게 달콤한 마시멜로나 쓴 커피처럼

우리 인생도 고진감래 뒤엉켜 재미있게 살아지겠지.

아, 좋다. 이 밤이. 참 좋다.  




그렇게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시나브로 길들여가는 이 순간이

참. 좋.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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