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 적성에 맞다는 증거 하나
결혼 15년 차 우리 집엔 한국도자기 6인용 한 세트가 있다. 혼수로 샀던 그릇이다.
PCS가 넉넉한 것을 산 덕분에 불편함 없이 잘 쓰고 있다. 백색 바탕에 연두색 풀잎 한 줄기가 무늬로 있는 터라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고 질리지 않다. 설거지하면서 몇 개 깨졌지만 4인 가족 우리 식구에게는 부족하지 않다.
지역 맘카페나 SNS에 예쁜 그릇 사진이 올라오면 그 그릇의 브랜드, 제조국가, 비슷한 계열의 다른 브랜드까지 줄줄이 열거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나는 그릇 브랜드라고는 한국도자기나 코렐 정도밖에 모르는데 다른 세상 같다. 어쩌다 백화점에 가도 주방용품 코너는 지나가는 길에 있어도 보지 않는다. 언제인가 한번 괜찮아 보이길래 집어 들었는데 접시 하나가 십만 원이 훌쩍 넘어가 깜짝 놀라 사뿐히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돌잔치 답례품으로 받은 대형 접시 몇 개도 ‘미니멀 라이프’ 흉내 내면서 갖다 버렸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그릇이 참 많았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 덕분에 그릇이며 인테리어 소품이며 우리 집 곳곳엔 소꿉놀이 같은 풍경이 배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엄마를 닮지 않았다고 아쉬워하신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왜 계절마다 그릇을 바꾸어야 하지? 왜 분위기 따라 그릇이 바뀌어야 하느냐 말이다.
지금 나는 그릇 매장에 와 있다. 지나가다 들린 것이 아니다. 일부러 찾아왔다.
라면을 닮을 일본식 면기가 필요하다.
주말 브런치에 쓸 원형 목재 그릇이 필요하다.
곧 날씨가 쌀쌀해질 테니 스프볼(soup bowl)도 필요하다.
꼼빠냐를 먹을 높이가 낮은 백색 커피잔도 필요하다.
그릇들을 요리 보고 조리 보고 하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마음에 드는 것은 예상보다 가격이 비싸고 세일하는 것은 눈에 차지 않는다. 결국 한 시간의 보람도 없이 빈 손으로 매장을 나왔다. 주말에 이케아라도 가봐야겠다 다짐하면서.
남편은 이런 내가 신기한 듯 몇 번을 쳐다본다. 이런 내가 낯설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릇가게에 와 있다니. 그릇을 사러 주말에 그 사람 많은 이케아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뒤늦게 찾은 나의 적성이 드디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려나 보다.
요리도 잘하는데 플레이팅(plating)까지 완벽하면 이거 ‘홈 키친(home kitchen) 유튜버’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