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게시판에 임원/팀장급 인사 및 조직개편이공지됐다. 본래 연말경에 진행되어야 하는 이번 발령은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올해상당히 미뤄졌었는데, 열어보니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사발령이 게시되자마자 갑자기우리팀 팀장님이 일어서더니, 내 옆자리의S차장님께웃으며 말을 걸었다.
"S팀장, 축하해! 왜 다른 사람들은 축하 안해주니?"
그 옆에서 우리는 축하 대신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인사발령의 내용인즉슨, 갑작스레 우리 부서의 팀장이 바뀐 것이다.누가 보더라도 브랜드의 실적 저조에 따른 보복적 인사였다. 팀장이됐으니축하받을 사람은 있지만, 팀장에서 내려와야 하는 그 누군가 때문에 마음 놓고 축하할 수만은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며칠후, S차장님이 팀장 석으로 자리를 옮겼고,기존팀장님은 다른 부서장 자리로 (쫓기듯) 이동됐다. 두분 다 본인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나중에 듣고 보니 기존 팀장님은 본인이 쫓겨난다는 것을 그날 아침에야 알았고, 현 팀장님은 본인이 팀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인사발령 게시를 보고야 알았단다. 다시금 새삼스레 '회사는 참 냉정하구나' 깨달았다.
얼마 전, 점심시간에 만난 L후배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나는 먹던 수저를 탁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입맛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일 것이다.
후배 본인이 이번 권고사직 대상자라는 것.회사 사정이 어려워 인건비 절감을 위해 사람을 줄여야 하는데, 본인이 나가줬으면 한다고 팀장과 면담을 했다더라. 협상의 여지는 없고, 무급휴직 아니면 퇴사-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무조건 골라야 하는 상황이란다.그래서 본인은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위로금을 받고 퇴사하는 것으로 결정했단다.
그녀가 어렵게 꺼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격분했다. 회사에서 누군가를 내보내야 한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이L후배는 아니었다. 나와도 같이 일해본 그녀는 들어온 지 이제 갓 5년 된, 보기 드물게 의욕 넘치고 패션업계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몹시 애착 있는 사람이었다. 실적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연유가 있어 팀장이 그녀를 보내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업무 능력 및 앞으로의 미래 가능성을 모두 생각해 봐도 쉬이 용납할 수 없는 악수(惡手)였다.
물론 L후배 역시 본인에게 생각지도 못한 그러한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특히나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국에 차디찬 회사 밖으로 내몰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안 일지- 내가 모두 가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조금이나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잠시 리프레시 휴가라고 생각하자. 더 좋은 곳으로 분명 갈 수 있을 거다. 이 회사 어차피 오래 못 간다. 등등)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억울함을 표하며, L후배는 퇴사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회사에서는 그녀를 내보내는 것이 맞다고 결론을 지었고,그렇기에회사는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고, 그녀는 나갔다. 구구절절한부연 설명을 빼면 이것이 팩트였다. 회사는 존속이 어려웠기에 직원을 잘라야만 했고, 그 직원이 20년 된 부장일지, 5년 된 대리일지, 혹은 갓 입사한 신입사원 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회사는 영리 추구라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이는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대게 이 회사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입사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부끄럽지만 입사할 때 나의 목표는 적어도 임원, 가능하다면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되어 회사를 멋지게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한 해 두 해 다니다 보면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회사 일들은 내 의사와 크게 관계없이 진행되고, 설령 내 의사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말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비슷한 다른 누군가'의 의사여도 무방하다. 즉, 스티브 잡스나 팀 쿡과 같이 나의 존재가 곧 회사인 사람들, 혹은 CEO나 영향력이 뛰어난 아트 디렉터가 아니고서야, 나 정도는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 슬프지만 현실이다.
최근 몇몇 사람들을 보내오며 생각해보니, 나의 7년간의회사생활 동안 적으면 적고, 많으면 많은 상사를 모시고 팀을 겪어왔다. 그리고 내가 겪어왔던 상사들은 결국엔 본인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타 팀으로 전배 되거나 혹은 면팀 (팀장에서 해직)되거나, 최후에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회사에서 더 이상 그들이 있어야 할 필요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에 매정하게 내쫓는 것이겠지만, 자발적 의사 없이 쫓겨나는 상사들의 표정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몇십 년 동안의 인생을 바쳐 다닌회사에서의 말로였다.
회사는 나의 상사들을 내친 것처럼 나 역시 언제든지내칠 수 있다. 이번엔 코로나로 인한 경기불황이 트리거가 된 것일 뿐이지,회사는 언제, 무슨 이유에서든 직원이 필요 없어질 수 있고, 그래서원치 않는 발령이나 권고사직 또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합법적인 방어책 또한 존재하나,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실제로 저러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여러 이유로 인해 회사의 권고를 꺾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회사는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아니라는 것을.회사는 내가 커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같다가도, 언제든 필요에 따라 냉정하게 나를 차가운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다. 회사는 당신이 무럭무럭 커가도록 물을 주고, 양분을 주며 마냥 따뜻하게 기다려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두가지다.
1. 회사가 나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다
- 그 말인즉슨,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회사에서 스티브 잡스, 팀 쿡과 같은 사람이 되면 된다. 내가 없으면 이 회사의 존속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사람이 되는것이다.
단점은 밑에서 젊고 감각 있고 능력 좋은 후배가 수도 없이 치고 올라온다. 회사 입장에서는 비슷한 능력이라면 더 젊고 감각 있는 사람을 쓰는 게 낫기 때문에, 내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야만 이 회사에서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나를 단련시키고, 업(業)을 위해 내 시간을 바쳐야 한다. 모두에게 인정받지만, 조금은 외로운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2. 회사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린다
- 말 그대로, 회사가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내가 먼저 회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나의 커리어, 혹은 인생에 있어 이 회사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미가 없다고 판단될 시 내가 먼저 놓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속 회사를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어학 공부나 관심 있는 분야에서의 학업, 유튜브, 운동, 취미생활 등 무엇이든 좋다. 끊임없이 나를 발전시키고, 나에게 의미 있는 것-나에게 제2의 인생이 되어줄 터닝 포인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회사를 버릴 준비는 회사를 대충 다니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회사는 당신을 제일 먼저 필요 없다고 속단하고 내칠 것이다. 회사에서의 업무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되,회사 밖에서는 지속적으로 준비하고, 배워나가야 한다. 어찌 보면 퇴근하고 나서도 무언가를 해야 하기에 두배의 힘이 드는단점이 있다.
내가 느껴온 바들을 구구절절하게 적긴 했지만 사실 하나로 귀결되는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직원들의 커리어와 복지를 내 것처럼 소중하게 대하는 회사도 있을 것이고, 내가 스티브 잡스가 아니더라도 내 역량과 뜻을 최대한으로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훌륭한 회사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회바회(회사 by 회사), 사바사(사람 by 사람)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느 회사를 다니든, 어느 직무에 있든 제2의 인생을 위한준비를 하는 것은 결코 후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100세 시대에 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재의 나와 같은 직업, 같은 회사에 종사하고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 중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커리어에 변곡점이 생길 것이기에,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 변곡점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상태로 즐기며 맞이할 수 있도록무엇이든 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