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Bee로 산다는 건

회상

by 포레스임

딸아이가 태어나던, 그날이 생각난다. 동네 산부인과 입구에서 나는 초조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산달이 다 되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있겠거니 생각만 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잠결에 집사람이 갑자기 내 손을 쥐고 힘을 주고 있었다. 순간 드는 생각은 ‘아! 시작되는구나’ 오랜 기다림의 피날레가 그 시각이었다.

서둘러 차에 시동을 켜고, 동네 병원으로 향하니, 내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집사람을 분만실로 보내고 죄어오는 긴장감을 감추고자 애꿎은 담배만 피웠다. 다행히 순산하여 신생아실로 가니 아직 눈도 못 뜬 아기를 간호사가 나에게 보여준다. 살아온 날들이 고장 난 필름을 돌리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새로운 삶의 주인공 역을 맡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아비로서의 또 다른 배역이 주어졌다. 사람은 세상을 사는 동안 한 가지 배역만으로 살 수 없다. 일인다역의 배우로 인생이라는 무대는 변화무쌍하게 세팅을 바꿔준다.


나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창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이제부터 아이를 둔 아비로써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야 했다.

샛별이 초승달을 따라서 지는 그 해 추운 겨울, 떠밀리듯 문밖을 나섰다. 일정한 직업도 남겨진 돈도 얼마 없었다. 장인어른의 지원으로 근근이 버티는 생활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삶의 무게가 기나긴 터널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아파트 옥상의 방수공사에 일당으로 예약이 돼 있었다. 막일해 본 경험은 없었다. 이것저것 가릴 것도 없었다. 나는 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굴착기를 들고 아파트 옥상의 낡은 시멘트 껍질을 벗겨내는 일을 맡았다. 일이 끝나고 일당을 받아 드니 손이 떨렸다. 굴착기 감각의 잔상이 손에 남아 있었다. 아기 옷을 한 벌 사, 집으로 가서 자는 딸에게 대보니 흡족했다. 애 엄마는 옆에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Pixabay]

굳이 제목을 ABee라고 한 것은 그동안의 삶이 꿀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날갯짓이 비록 힘들고 외롭지만 열심히 꿀을 나르는 벌처럼 내 생애도 '아비'로서 그 역할을 잊지 않았다.


사내아이는 키워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딸아이를 나는 친구처럼 대한다. 요즘은 다 커서인지 제법, 제 엄마처럼 잔소리도 해댄다. 그게 한편으로는 감사하며 고맙다. 가족들 중 나에 대해 관심과 질타를 해 줄 친구가 있다는 건, 생동감이 있어 좋게 생각된다.


아이가 자라면서 애 엄마는 온통 딸아이 이야기뿐이었다. 나 또한 관심이 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내색은 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갈대 같은 심성이지만 태산 같은 중심을 잡으며 살아야 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성장함을 느꼈다.



딸애가 커서 이젠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출산과 육아가 우리 때와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부부가 공동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육아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육아휴직을 내는 것도 좀 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저출산 대책이라는 허울 좋은 법안으로 지하철에 임산부석이나 만드는 이상한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 정작 정책 입안하는 세대가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또래의 사람들이 태반이니, 한동안 불협화음은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한창이다. 모든 생물은 짝짓기를 한다. 그것이 순리요, 순환의 원리다. 비록 잠시 사회 여건이 불비하고, 지나온 문화유습이 현실과 괴리된 사회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순환을 거치듯, 인구감소 현상도 해결될 것이다. 아비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건승을 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