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공부는 타고난 하나의 능력일 뿐이다

by 포레스임
지금 국가에서는 시속의 글솜씨로 인재를 뽑고 있다. 각종 이권과 녹봉이 이것에 달렸고, 성공과 명예가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 길이 아니면 더불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제가, 《과거제도에 대하여》 중에서



며칠 전 서울 강남의 모 지역에서의 초등학생들의 방과 후 학원 순례를 답답하게 TV로 지켜봤다. '초등 의대관'이란 간판의 학원에 그 어린것들이, 등가방도 아닌 손수레 가방을 끌고 부리나케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학원가의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프라인 학원들이 오죽하면 이슈를 의대로 집중시켜, 학부모들의 기우와 염려를 이용한 새로운 커리큘럼을 짠 것으로 보인다. 참 대단한 아이디어고, 열의들이다.


이 땅에 처음 시험이 시작된 시기가 고려 광종 때 AD 958년에 과거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러면 천년이 넘는 세월이 필기시험의 역사인 셈이다. 그 시간을 뛰어넘는 우리 민족의 머릿속 패러다임은 단단하게 고형화 되어있다. 공부를 해서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명제는 한치도 어긋남 없이 지금도 진행되는 중이다.



내가 어릴 적 책으로 보거나, 듣던 이야기 중, 한석봉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불을 끈 상태로 석봉의 엄니가 하신 말씀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색창연하다. 그래도 한석봉은 시험에 합격하여 문신(행정공무원),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고 잘 살았으니 여한이 없겠다.


문제는 이러한 한석봉의 모친과 같은 위대한 어머니분들이 아직도 굳건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내 아이 교육에 관해서는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없이 한마디 하자면 공부는 타고나야 한다. 이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 어떤 사교육으로도 이 정의를 비켜갈 순 없다. 왜 우리 아이가 미술에, 피아노에, 태권도에 재능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공부는 재능이라는 말을 꺼리는 걸까?


초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을 원하는 대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이라는 조건과 맞추어 학원 뺑뺑이 통제를 하면서 키우면 과연 부모가 원하는 대로 커줄까? 설마 이러한 이론을 지금도 신봉하는 학부모가 계신단 말인가.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람은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아니다. 물론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특히 3세에서 7살 때까지의 교육은 중등학교와 대학교육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나도 갖고 있다.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다. 사농공상의 케케묵은 봉건왕조 시대도 아니고, 꼭 어느 특정직업을 가져야만 행세하는 시기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인식은 가치편향적이다. 공부는 타고난 한 가지 능력일 뿐이다. 물려받은 DNA가 96~98%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 공부만을 우리 애의 나갈 길이라고 생각한 부모님께는 죄송스러운 말일 수 있다. 어릴 때일수록 많은 경험을 시켜주는 것은 가치다양성 시대에 부모의 역할일 수 있다.


축구를 유난히 광적으로 즐겨보는 입장에서, 나는 손흥민이나 김민재 부모가 부럽다. 요즘은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마라도나 이후 SSC나폴리를 33년 만에 우승으로 이끈 김민재에게 홀딱 빠졌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시즌동안 이루어낸 위업이니 말이다. 김민재 축구선수 집안은 가족이 모두 체육인인 집안이다. 아버지가 유도선수, 어머니가 육상선수 출신이며 통영에서 횟집을 운영한다. 김민재 형은 한 살 터울로 명지대 골키퍼 출신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모두가 의사나 판검사가 될 필요는 없다. 직업을 직장과 분리하는 세대가 현재의 젊은이들이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의 직업을 얻을 수도 없고, 직장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7년 주기로 변한다고 한다. 특히 7살과 14살 그리고 21살이 되면 각자의 특성과 존재로서 자기만의 세계가 형성된다. 내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 아이들과도 끊임없는 대화로 고민을 공유하는 부모의 역할을 골똘히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60년대 생으로 요즘은 '마처세대' 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좀 억울하기도 하지만, 세태가 그리 흐르니 어쩔 수 없다. 하긴 나부터도 자식에게 부양받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이런 생각의 확장은 내 아이를 엄연한 독립된 인격체로 봐야 한다는 뜻일 게다. 내가 낳고 키웠으니 나의 소유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어느 동물이 새끼를 낳고 키워 부양을 받는단 말인가?


'알프레드 아들러'는 프로이트학파의 일원이었으나, 딸을 키우는 놀라운 경험을 통해 인간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학회를 탈퇴한다. 아들러가 본 인간의 발전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열등성을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성장한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들러에 동감하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딸아이를 키우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내 아이지만 어느 날, 어디서 불현듯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남들과의 비교, 경쟁의 틀 속에 가두지 말고 개성 있는 독립한 인격체로 대한다면, 아이는 스스로 각성하고, 성장하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나의 아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는 시간만이 해답이다. 아이들은 지레짐작으로 유추할 수 없는 깊고 푸른 성장의 바다와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림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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