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협회 사무실로 갔다. 원장은 반갑게 나를 맞았다. L그룹 비서실장의 일로 찜찜했으나 의외의 말을 나에게 한다.
"수고했어요! 차를 받은 사모님들이 아주 만족해하시더군요!" 뭔가 뒷면에 적힌 명함을 내민다.
"내 차도 하나 뽑아줘요! 계약서에 넣을 신상정보 적어 놨어요! “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당황스러웠다. 내게 호감을 주는 원장이 까닭이 있을 것 같았다.
"원장님! 서비스로 무슨 품목을 해 드릴까요?"
"필요한 건 다 기본으로 주잖아요!"
"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 성의도…. 있으니…."
"그런 것보다, 아직 기회가 있을 거 같은데 왜…. 영업으로 잡았죠?"
"네…. 그건…."
"나이도 그렇고…. 사이즈도 되고…. 혹시 미스타임…! 춤 배울 생각은 없어요?"
본론에서 벗어난 대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괜히 잘못 대답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극구 부인했다. 몸치에 운동신경도 별로인데 춤이라니, 나를 그렇게 봐준 것만도 고맙다고 답했다. 사무실에선 계속 호출해 댄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공구상가 식품점 아주머니 소개로 전화했다고 한다. 연쇄 계약이 터지는 모양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여의도 보다 영등포의 그곳이 더 정감이 갔다. 실질 수익도 낫고, 무엇보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착해 가게 주인께 감사의 뜻을 표하니, 건너 동의 케이블 가게로 가보라 한다. 가보니 의외로 젊은 사장님이 반긴다. 동력 전달용 케이블을 주로 취급하고 있었다. 점포를 연 지 며칠 되지 않고 자금도 차를 살 만큼 넉넉지 못하다고 했다. 승합차의 견적을 뽑으니 선수율이 문제였다.
30% 정도의 차(車) 값은 내고 나머지를 할부로 할 수 있는데, 그 돈이 없다는 것이다. 대출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내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한다. 여의도는 금융의 중심지답게 각종의 업종별 기관이 밀집해 있었다. 사업을 하려면 차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차를 출고시켜 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자동차가 생필품처럼 꼭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고파는 이 관계는 진부하지만, 사회작동의 근원이고 내가 하는 일이 좋았다. 나는 원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면, 반드시 내 성의를 다해 주기로 했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시중은행은 힘들어 보였다. 조금은 부담을 감수하는 상호신용금고에 문의하니, 담보로 차를 잡고 해 주겠다고 한다. 물론, 이자는 높았다. 전화로 케이블 가게 사장에게 결과를 전하니 뛸 듯이 좋아했다. 등록과 할부에 필요한 서류를 바로 준비하겠다고 한다.
하루 동안 두 대의 차를 계약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접수대부터 찾으니, 수석 과장님이 저녁 시간을 비우란다. 회식이 있다고 했다. 전체 회식인 줄 알았으나 아닌 것 같다. 업무정리를 하니 담당 김 과장님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고 한다. 같이 내려갔다. 오 대리님과 각과의 과장님과 수석 과장님, 나까지 6명뿐이었다. 두 대의 차를 나눠 타고 여의도를 벗어나 강남 쪽으로 가는 듯했다.
오 대리님은 나에게 이렇게 모인 얘기는 비밀로 하자고 한다. 내가 자격이 돼 부른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처음엔 과장들끼리의 모임이었으나, 오대리가 합류하고 좀 더 발전적인 성격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흑기사'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주차한다.
"자! 한 잔씩 따랐으면 건배하자고!"
수석 과장님이 건배를 제의한다.
가운데 둥그런 홀이 있고, 동선을 따라 방이 배치된 룸형식의 술집이었다. 잠시 후, 낯익은 여자가 들어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한때 유명했던 영화배우였다. 이런 곳의 술값은 비싸겠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 한마디 하란다. 얼결에 앞으로 나가 두서없이 인사를 한다.
"과장님들과 대리님의 자리에 제가 끼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초보 영업사원인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받고 앉으려 하니, 수석 과장님이 한 말씀하셨다.
"임오구 씨는 될성부른 나무라 생각해 부른 거야! 열심히 해봐!"
오 대리님도 장단에 맞춰 건배 제의를 했다.
"자! 새로 탄생한 세일즈맨 임오구를 위하여!!"
영업 생활을 하고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어 멋쩍었지만, 뭔가 내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직업적으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 본성이 변할 리는 없지만, 습성은 달라질 것이다. 먹고살자면 그것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야 한다. 한 가지 모습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페르소나는 상황과 배역에 따라 다른 가면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취하도록 마셔댔다. 영업으로 시작하는 내 인생이 어떻게 귀결될지 조금은 의구심도 있었지만, 오늘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돈 한 푼 없이도 차를 뽑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난 것 같았다. 공구상가 사장들이 나를 연신 찾는다. 그 소문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문의는 계약으로 연결되었다. 한 달에 평균 20여 대의 차를 팔아 치웠다. 대졸 신입으로 대기업에 들어가 받는 초봉의 3배가 넘는 액수가 내 통장에 들어왔다. 지점장님은 내 계약분만 따로 취급할 수 있도록 사무 여직원에게 업무 분담해 주었다.
상호신용금고 직원은 덩달아 내 건은 특별 취급해 주겠다고 했다. 그에게도 실적 상 내가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되었나 보다. 차량 가격의 30% 정도의 금액이니 건수만 많으면 위험도도 낮고, 그에게도 좋은 실적의 빌미가 되어 서로가 윈윈 할 수 있었다. 26살 나에게 세상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나름의 목표도 잡아보았다. 30대가 가기 전에 10층 높이의 빌딩을 갖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그래야 한다고 다짐했다.
입사 동기들이 저녁을 한 번 하자고 한다.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그들과 유리되고 싶지는 않아 참석했다. C는 내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운다. 계속 같이 다녔어야 한다는 둥 의, 너스레를 떨었다. M은 혹시 미팅을 주선하려는데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 실적도 나와 비교해 떨어지지 않고 유난히 쾌활한 그에게 동의해 주었다.
연말이 되자 더 바빠졌다. 연식이 바뀌는 통에 되도록이면 이월을 시키지 않으려 대대적인 세일에 들어간다. 조건도 많이 완화되니 호기였다. 강대리님이 나에게 혹시 상용차 계약건이 있으면 달라고 한다. 그만큼의 수당은 넘겨준다고 했다. 승용과 승합차만이 우리의 거래차량인데 뜬금없이 화물차량 얘기를 꺼내니 의아했다. 그렇지 않아도 공구상가 거래 시, 화물차 수요도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고맙기도 하다. 내 영업의 차종을 넓혀준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 때는 잘 나갔어! 너무 무리는 하지 마!"
강대리님은 맥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대리급이라고 하지만 실적도 그렇고, 지점장한테 늘 깨진다고 들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다.
점심은 가망고객들과 저녁은 예약이 많이 잡혀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N기업 구대리와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내일은 공구상가 연합회 사무실 회식에 가기로 했다. 모레는 개인택시 조합의 기사분들에게 브리핑 겸 식사가 예정 돼 있다.
한창 바쁜데 동원소집훈련 통보장이 왔다고 한다. 영업사원은 직장예비군에 편입이 안돼 각자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일주일 동안의 예비군 훈련을 위해 입소했다. 간만의 군부대 풍경은 왠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주특기가 차량수송이니 지원부대에 들어와 행장을 바꿔 입고 첫 식사를 하는데, 이상하게 진땀이 났다. 식사도 할 수 없어 부대 의무대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