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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Nov 28. 2023

겨울나기

잃어버리고, 잊혀 가는 날들



 봄부터 시작한 환희가 여름의 절정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기 무섭게 겨울이 성큼 문 앞에 와있다. 또다시 기나긴 추위와 황량한 바람에 온몸을 감추기 바쁜 계절이 도래했다.


 겨울은 가식이 없다. 자연의 사계 중에서 겨울만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절기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숨어들 뿐이다. 씨앗으로 남아 여름을 꿈꾸지만 순환의 원리는 화려하게 또다시 무성한 잎과 꽃을 피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따스한 이불속에서 꿈꾸는 사이, 누군가는 추위에 떨며 분주히 나의 몫을 채워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리는 그렇게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군상들이 움직인다. 새벽이 오기에는 밤이 너무 길어 바람이 이리저리 휩쓸고 다녀, 낙엽 또한 누군가의 근심으로 남아 새벽길을 재촉한다.


 겨울은 이별의 종점 역할을 올 해도 충실히 할 것이다. 학교마다 졸업을 준비하고 그간의 결실에 아쉬움과 환희에 눈물겨워할 것이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나는 무엇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시간은 내 곁을 지나가 어딘지 모르는 몽환의 시간대에 나를 걸쳐놓았다.


 점점 시간에 낯선 느낌을 받게 되고는 한다. 시간은 나이 곱하기 2를 하면 시간의 속도가 나온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러면 나는 이미 100km가 넘는 속도의 시간을 사는 셈이다. 어쩐지 유난히 빠르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각기 다른 사업소에 근무하는 지인의 소식이 들렸다. 폐암으로 인해 한쪽 폐를 전부 들어냈다고도 했다. 내년에 나와 손잡고 퇴직할 친구라 진위여부를 알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 초조히 상대방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죽진 않았어! 요즘 의료기술이 좋아! 숨은 좀 차는데, 살아갈 거 같아! 고마워!"


몸조리 잘하란 짧은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평소 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한마디 할 때마다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대답을 유도하는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한다.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인들은 퇴직 한지 한 두해나 됐을까? 암환자가 됐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강원도 화천 출신의 그렇게 근력이 좋았던 형님도, 평소 건강관리에 그리도 많은 신경을 쓰던 분도 각기 폐와 간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우리야 가족이 아니니 잘 모르는 점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암은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물론 식생활과 그 외 기호품 등도 큰 영향을 주겠지만, 스트레스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막내 고모는 나와 연배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중학생 무렵부터 남대문의 빌딩 '엘리베이터 걸'을 해야 할 만큼 7남매의 막내로도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았던 듯하다. 나 타고난 성품이 워낙에 밝으셔서 내가 조부모댁에서 살 적에 퇴근해 집에 올 때면, 웃으며 센베과자 봉투를 던져주시던 기억이 선명하다. 주말이면 설악산 오색약수터를 뒷산 오르듯 하시던 분이 결혼 후, 아들 하나를 남기고 홀연히 암투병 몇 년 후 돌아가셨다. 결혼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기기는 버거웠던 듯하다. 요즘이야 이혼이 상례화 된 풍습이지만 옛사람이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렇게 고모는 한겨울 눈이 흐드러지게 내리는 날, 하릴없이 숨을 거두셨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부모나 결혼생활을 하는 주변인들의 삶의 행로가 그렇게 행복으로 연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삶에 있어 행복은 누군가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한 갑자의 인생을 살아보고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차라리 혼자인 경우가 내적인 충만감을 느끼기에 만족스러울 때가 많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오롯이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후회와 연민을 맛보고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도 누구를 의탁하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겨울의 세찬바람에도 묵묵히 서있는 저 나무들처럼...,


나의 경우 뜻밖의 영원한 이별은 늘 겨울에 있었다. 어머니도 성탄일 다음날 영원히 모셨던 기억이 새롭다. 더 이상은 겨울에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고 싶지 않다.


나의 생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 비록 범부로 살다가는 길이 정해진 삶이지만 후회나 미련이 별로 없다. 그러나 나도 이해 못 할 오욕에 따른 반역의 행로는 두고두고 나를 옥죌 것이다. 투명하고 차디찬 바람이 나를 씻기우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겨울바람은 지난 나의 원죄를 현재의 허상으로 보여주며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강철 같은 겨울도 때가 되면 자취를 감추고 환희의 봄을 부를 것이다. 그때까지 모두가 무탈하고 안녕히 지내길 기원해 본다. 영화의 제목처럼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소리지만 광장의 겨울바람에 띄워 보낸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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