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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Jul 20. 2022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장의 무게감

그 전 이야기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다.

회사에 출산 휴가를 내고 또 이래저래 휴가를 더해 약 2주간 휴가를 낼 수 있었다.


아이는 예정일이 되어도 나올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 오라는 날짜에 짐을 싸들고 병원에 가 그다음 날 유도분만을 진행했다. 아내가 분만실에 있을 때부터 눈물이 났다. 진통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를 보며 내가 해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저 아내가 건강하게, 무탈하게 출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분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TV에서만 보던 그런 장면이었다. 아이는 세차게 울었고 목소리만 들어도 건강하다는 걸 알 정도였다. 다행히 둘 다 건강했다.


엄마 뱃속에서 막 나온 아이가 내 손가락을 잡았다.

정말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다. 출산 후 아이를 옆방으로 데려가 따뜻한 물에 씻기고 아빠와 5분 정도 안고 있는 캥거루 케어를 했는데 나중에 간호사 분이 찍어준 영상을 보니 아이가 나에게 안겨 목도 못 가누는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안심한 듯 울어댔다. 


언젠가 친구가 처음 아이를 안는 순간 그 무게감, 가장으로써의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긴 휴가 덕분에 아내와 산후조리원에 며칠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아내는 모유수유와 마사지 등으로 가끔 방을 비웠기에 나는 혼자있을 시간들이 꽤 있었고  생각할 시간들이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이래저래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결혼하는 순간부터 아내를 위해,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니 이제는 우리 가족을 위해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에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한 회사에서 10년간 일했다.

대기업에서 10년간 일했기에 연봉도 우리 가족이 먹고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아내와 결혼할 당시엔 내 인생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시기였다. 아내에게 사주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아낌없이 사줬다. 가고 싶은 여행도 언제든지 갔다. 그러나 나 스스로에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는가?


운이 좋아 좋은 회사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왔다.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는 것에 감사했고 매일 아침 6시 반까지 회사에 출근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해서 불을 켤 정도였으니 나보다 회사에 일찍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성격이다.

어떤 일에 꽂히면 거기에 올인한다. 그것이 일일 때고 있고 사랑일 때도 있고 여행일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항상 진심으로 대했고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결혼도 그렇게 하게 된 것이었다. 10살이나 차이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결혼하자는데 아내는 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내에게서 '이 사람이다'라는 감정을 느꼈고 진심을 다해, 열정을 다 했다. 그렇게 아내의 닫혀있던 마음은 열리게 되었고 나의 마음을 받아주어 결혼하게 되었다. 


이런 나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에는 진심과 열정을 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일이 그랬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느냐에 대한 의문은 내가 일에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어느 누가 회사가 좋아서 다니겠는가.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다니고 있었다. 돈벌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현실에 안주한 것일 수도 있다. 돈을 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앞으로는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생각이 휘몰아쳤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속한 업계는 굉장히 젊은 업계다.

평균 연령이 서른 초반인데 막 이직하여 다니고 있던 회사에 40대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모시던 팀장님이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는데 회사에서 유일한 40대 팀장이었다. 50대 직원은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분은 전문직이었고 다른 한 분은 사장님이었다. 이 정도로 이 업계는 젊었고 젊은 업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40대 중반에 팀장이니 더 위로 가면 임원인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팀장님은 아이가 셋이었고 외벌이에 얼마 전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매월 대출금을 200만 원 이상 갚아야 했다. 그러나 팀장님의 입지는 위태로웠다. 정말 잘리기 직전이었다. 물론 이직을 하면 된다지만 업계가 젊고 팀장급 이상의 자리가 적은 이 업계에, 그 나이대에 이직하는 건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런 팀장님을 보면서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지금 이 월급이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의 10년, 과연 나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년은 커녕 5년은 버틸 수 있을까?


막 태어난 아이 그리고 아내. 나는 그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다.

지금 월급을 여유롭게 받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10년 뒤가 아닌 5년 뒤에도 이 업계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No'라고 생각했다.  


지속할 수 없다는 것


좋아하지 않는 일을 이미 10년간 했다. 그런데 앞으로 10년간 더 할 수 있을까? 할 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그전에 나가야 된다면 나는 하기 싫은 일만 하다가 회사를 나가야 되고 그때 돼서 내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린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산후조리원을 떠나기 전날 나는 아내에게 이런 나의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출근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3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잠이 안 와...' 아내는 바로 전화가 왔다. 수많은 생각들이 돌고 돌던 나는 아내와 통화를 하던 중 결단을 내렸다.


나 회사 그만둘게


아내는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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