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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Jul 16. 2022

부모님 이혼 후 처음 불러보는 '우리집'

가장의 무게

결혼 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의 직장문제였다. 나는 10여 년을 해외에서 근무를 했고 한국에 파견을 나와있는 상황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내와 결혼 허락을 받았지만 장인, 장모님은 큰 딸이 적어도 한국에서 일 년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해외로 갔으면 하셨다. 그러나 회사는 그런 날 기다려줄 수 없었고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나의 꿈이기도 했던 해외에서의 성공은 아내를 위해 접기로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의 내 인생을 나를 위해 살았다면 결혼 후의 인생은 아내와 가족을 위해 살면 되었다. 


30대가 되어 생긴 꿈이자 목표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이제 그것을 실행할 날이 온 것이었다.


결혼 전 퇴사 준비와 동시에 이직을 준비했는데 이직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결혼식 전에는 결정을 해야 했는데 이것이 결정 나지 않으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신혼집을 차릴 곳을 정하지 못했다.

이직을 하게 되면 업계 특성상 나는 분명 서울로 가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기에 결혼 두 달 전까지 신혼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전, 가구 등을 아무것도 구매할 수가 없었다. 나의 가족사로 인해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든 걸 받아주신 장인, 장모님이었는데 나의 직장 문제로 또 신경 쓰이게 해 드리다니, 나로 인해 장인, 장모님은 여러모로 골치 아프셨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면접을 받던 곳에서 합격 통보가 왔다.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아내와 나는 그 길로 서울로 가 집을 알아보았다.

회사 근처 오피스텔을 계약하였다. 겨우 10평짜리 오피스텔이어서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살 수가 없었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쓰던 자신의 방 보다 작은 오피스텔에서 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내는 만족했고 우리는  재밌게 잘 지냈다. 임신하게 된 아내는 6시면 출근하고 빨라야 밤 8시가 돼야 집에 돌아오는 나를,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에서, 그 작은 방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작은 원룸에 살던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큰집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회사와 가까운 곳에 살고 싶었다. 10여 년을 회사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 걸어서 출근하기도 했기에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또 나는 부동산은 떨어진다는 주의였기에 부동산 매매를 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직장 선배 한분이 그랬다.


나도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애들이 계속 커가는데
남의 집에 살면서 계속 이사 다닐 수는 없더라고.


이 말이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가장의 무게인가?

그 뒤로 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여기저기 사는 분들에게 동네 환경을 묻고 다녔고 추천해 준 동네를 아내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함께 추천받은 동네를 미리 검색해 보았고 차를 몰고 그 동네를 가 둘러보았는데 아내가 살았던 동네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아내는 꽤나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장인, 장모님께 말씀을 드렸고 그다음 주 주말에 바로 올라오셔서 모시고 함께 가보았다. 두 분도 꽤나 만족해하셨다. 


당시는 한창 집값이 올라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집값이 다 오른 상황이었지만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더 큰집으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었고 전세나 월세가 아닌 '우리 집'이 필요했기에 집값이 오르고 내리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살 곳이 필요했고 세 달 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모든 걸 준비하고 싶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상의 한 뒤 전화상으로 부동산 업체와 계약했다.


그다음 주에 매도인을 만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명의는 공동명의로 했다. 장인, 장모님은 나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왜 고맙다고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집을 갖는 것이기에 공동명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한 뒤부터 '우리 집'이 없었다.

10여 년의 해외생활로 인해 항상 남의 집에 살았고 한국에 와도 부모님이 따로 사시는 데다 그곳에 내 물건이 없었기에 '우리 집'이라 부를 곳이 없었다. 부동산 폭락론자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우리 집'이 있으면 했던 것 같다.



집을 계약한 뒤 2주도 되지 않아 정부는 대출규제 정책을 내놓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우리는 내 집 마련을 못 할 뻔했던 것이다. 대출 여부가 확정이 안된 상태였기에 우리는 조마조마했지만 정책이 나오기 전에 대출을 신청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집을 받기 전 약 두 달 동안 집에 넣을 가전, 가구를 사러 다녔다.

대부분은 결혼하기 전에 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결혼을 하고 이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가구를 사기 위해 멀리 파주에도 가보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가전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몇 군데나 돌아다녔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꾸미는 것도 꽤나 재밌었다. 


드디어 이사 당일, 날씨는 너무나도 좋았다.

우리는 빈집에 가전, 가구를 채워 넣었고 드디어 '우리 집'을 완성하게 되었다.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약 20년 만에 '우리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집'에는 하나의 구성원이 더 생긴다. 우리의 아이라니... 나와 아내의 피가 섞인 우리 아이...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다. 무거운 책임감도 느껴졌다.


아내는 우리 집을 다 꾸미고 1주일 뒤 출산 준비를 위해 친정으로 갔다.

약 한 달 동안 나는 혼자 생활했고 예정일이 다가오고 나는 휴가를 내고 아내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큰 결정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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