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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Aug 05. 2022

내가 맞이한 첫 번째 이 세상과의 이별

모든 이별은 슬프다.

나에게 가장 가까웠던 이의 죽음은 우리 집 강아지(이하 M)였다. 

강아지라고 하기엔 너무 크지만 내가 고3 때부터 함께 했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강아지 이상의, 자식이자 형제와도 같은 존재였다. 우리 집에선 우리와 거의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부엌에 삼계탕 같은 것이 있었는데 어머니께 여쭤보니 내 것이 아니라 M의 것이라고 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M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대단했다. (나중에 여쭤보니 내가 나가서 먹을 것이라 생각하셨단다)


M은 10살 무렵부터 다리가 불편했다.

사람으로 치면 다리를 좀 저는 편이었고 가기 전에는 더 심하게 절었다. 한창때 운동을 정말 좋아했던 M이었다. 집 뒷산에 데리고 가면 그 산을 사슴처럼 통통 뛰어다녔고 학교 운동장에 가서 공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은 가출해서 온 동네를 찾아 해 메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아이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가출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어떻게 집 문을 열고 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대형견임에도 불구하고 약 15년을 살았다.

일반적으로 12~13년을 살다 가는데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15년을 살았다. M이 14살이 될 때부터 노견이다 보니 언제 무지개다리를 건널지 몰라 항상 노심초사했다. 집으로 오면 혹시나 저 세상으로 갔을 까 봐 항상 걱정했다. 그러나 M은 고맙게도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언젠가부터 일어나 걷지를 못했다. 항상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약 한 달 정도를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보내줘야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해외 근무 중이었기에 휴가를 내어 안락사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M을 보내기 전, 방에서 나는 M과 둘만의 시간을 달라고 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10대부터 30대까지 함께한 M이었다. 그런 만큼 많은 추억이 있다. 고3 때는 이 녀석이 가출하는 바람에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 말고 뛰어와 찾으러 다녔고 가족과 함께 M을 데리고 펜션에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당시엔 동물을 데리고 갈 수 있는 펜션이 적었고 우리 가족이 다 모이기가 참 힘들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참 많이 난다.


15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세월이었다. 

안락사하시는 분이 집으로 오셨고 주사를 놓았다. 서서히 힘이 빠지는 M을 보았고 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이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M을 끌어안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겨우 5분의 시간에 생사가 오가는 것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M을 화장하기 위해 데리고 먼길을 갔다.

화장터의 사장님은 이런 대형견을 화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정말 소중한 존재였나 보군요라고 했다. M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터의 사장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1년 이상 데리고 있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무려 3년을 함께 지냈다.


M을 떠나 보내고 어머니는 좀 더 있다 보낼걸 하는 후회를 많이 하셨다.

사실 M은 일어설 수 없었다. 혓바닥에 보랏빛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암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후회가 남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M을 보내고 약 한 달 뒤 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M이 나타났다. 

다리도 멀쩡했고 건강해 보였다. 나에게로 오길래 앉아서 안아주었는데 M이 있던 자리에 티켓 같은 게 있었는데 팔을 뻗어 그걸 주으려고 했고 (마치가 아기가 어른에게 안겨 무언가를 달라고 손을 뻗듯이) M이 그것을 줍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장례식 입장권 표의 일부였다. 박물관 같은 곳을 가면 긴 표를 입장할 때 반 정도를 떼어내고 돌려주는 그런 것이었는데 그것을 M이 나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주는 티켓을 보고 날 더러 그곳으로 보내달라는 것이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눈을 떴는데도 눈물이 나고 있었다. 마치 M이 어머니께서 너무 일찍 보냈나 하는 그 마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꿈이었기에 고맙기도 했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동물은 가죽을 남긴다고 했지만 M은 추억을 남기고 떠났다.

부모님과 이혼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살게 되었고 M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우리가 없는 빈자리를 M이 잘 지켜주었다. M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짖는 법도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우리 형제만큼의 사랑을 받았기에 건강하게 15년을 살았다. 어머니는 다시 홀로 집에 살아야 했기에 나는 마음이 쓰였다. 어머니는 당분간 그 어떤 동물도 키우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이었다.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슬픔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가족과도 다름없는 존재였고 어머니에게는 우리를 대신해줄 유일한 존재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개통령이라 불리우는 강형욱 조차 이미 보낸 자신의 강아지와의 이별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하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다. 아직도 어머니 방에는 M과 함께 찍은 사진과 그림들이 액자 속에 있다.


지금도 어머니 집에 가면 M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반겨줄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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