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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r 30. 2018

영화 <소공녀>

#사적인 영화 18: 미소 서식지를 찾는 소공녀의 안빈낙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소공녀>는 가장 좋아하는 세계명작동화 중 하나였다. 몇 번이나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주인공 세라와 스스로를 동일화하며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 굳게 믿었다. (어린 나이에도 인생은 아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여의고 명문 기숙 여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세라는 하녀로 전락하여 간신히 학교에 남는다. 천덕꾸러기 천애 고아가 된 그녀는 살아생전 아버지가 벌어 들인 富의 마법에서 풀려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학교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세라의 하나뿐인 보금자리는 첨탑의 허름한 다락방이다. 유일한 안식처에서 소녀의 유일한 친구는 비둘기와 같은 작은 동물들이다. 모두가 도시에서 소외된 존재다. 세라의 현실은 누가 봐도 불행이지만, 그 작은 소녀는 원망도, 좌절도 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기 안으로 잿빛 세상을 끌어안는 소공녀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만은 놓지 않는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의 미소(이솜)도 세라와 닿아 있다. 미소는 프로 가사 도우미로 일당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다. 비좁은 방 중앙에 커다란 트렁크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하루 일당은 착실하게 약값과 집세, 담배값으로 나누어 보관한다. 쌀은 떨어지고 춥고 배고파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미소에게 있다. 바로 담배와 위스키. 하루의 고된 일상을 위로해주는 위스키 한 모금, 담배 한 개비만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이 있다. 한솔이 원하는 맛집 데이트는 못할지언정, 미소는 그와 함께면 좋다. 문제의 발단은 2015년, 담뱃값 인상에서 시작된다. 두 배로 값이 뛰면서 미소의 경제 사정도 함께 흔들린다. 월세도 오르고 담배값도 오르고, 가계부를 쓰며 미소는 고민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취향과 집(이라 하기에 한 칸 방일 뿐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다락에서 발견한 사진 속 미소와 밴드 친구들은 환하게 웃고 있다. 미소는 겹겹이 옷을 껴입고 트렁크 하나 달랑 끌고 나온다. 달걀 한판을 손에 들고 밴드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함께 미소의 방에서 밤도 새우고 술도 마시며 웃고 떠들었던 그들은 사회인이 되어 미소를 맞이한다. 더 큰 회사로 이직하기 위해 스스로 링거액 주사를 놓는 문영, 시부모의 삼시 세 끼를 챙기지만 요리에 소질 없는 현정, 20년 동안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후배, 대용. 부모와 함께 사는 노총각 선배, 록이. 부잣집 며느리로 남편 비위 맞추며 사는 정미 언니. 그들 눈의 미소는 멈춰 있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철없는 사람이다. 사정이 딱하여 받아주는 사람도 있고, 받아줬다가 분란을 일으킨 집도 있다.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아내가 집을 나간 대용은 대인 기피증과 우울이 겹쳐 밤마다 눈물을 흘린다. 노총각 오빠 집에 생각 없이 들어가 진수성찬의 환대를 받지만 며느리로 가둬 두려는 가족 모략에 놀라 도망친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정미 언니 덕분에 좋은 방을 얻지만 미소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 앞에서 말실수를 한 듯한 미소에게 정미는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다. 설상가상으로 위스키 값도 오르고, 웹툰 작가를 포기한 한솔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떠난다. 미소는 홀로 서울 살이를 위한 집을 찾아 나서는데... 미소가 구할 수 있는 집은 곰팡이가 잔뜩 낀 벽과 손바닥만 한 창만 걸린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 원의 방 한 칸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 남일 같지 않다. 자기 팔에 직접 주사 바늘까지 꽂으며 점심시간마저 포기해야 하는 미정, 아침부터 저녁 내내 밥하고 설거지하지만 무시만 당하는 현정. 아파트를 원한 신부 때문에 어렵게 구했으나 아내는 떠나고 매달 백 만원의 집세를 20년 동안 분할 납부해야 하는 대용의 울음 섞인 하소연, 사랑하지 않아도 대충 사정에 맞춰 결혼하면 집도 얻고 가족도 생긴다는 록이의 궤변. 남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움츠러드는 정미 언니. 대다수가 그들처럼 살고 있고 그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미소는 한 소리 들어도 마땅한 인물이다. 그들처럼 사는 것도 빡빡하지만 전적으로 미소처럼 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는 미소와 친구들을 대비하여 보여주지만 어느 한 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다름의 인정을 존중한다.  여행 중인 미소는 담담히 트렁크를 끌며 엇갈린 명암 사이로 걸어갈 뿐이다. 어둡지 않으나 마냥 밝지만은 않은, 교훈이나 설교 없이도 오래도록 남는 여운. 과연 나라면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은 무엇일까. 너무 많아도 힘들지만 취향이 아예 없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밴드 친구들과 더불어 미소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남자 친구 한솔이다. 한솔은 꿈을 포기하고 미소와 잘 살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택한다. 연인과의 미래를 위하여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한솔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쉽지 않은 현실적 결정이다. 그러나 미소는 미래의 가정형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 되려 그만이 전전긍긍하며 죄의식을 키운다. 미소가 후배 남자 집에 지내는 것조차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며 불편해한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판타지 안에 갇혀 있는 인물이 한솔이다. 그는 미소가 무엇을 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한지, 옆에서 지켜봤을 텐데도 자기 내부에서 부정한다. 결국 그는 우리를 위한 선택보다 자신을 위해 떠났고 거기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연인이 다시 만나 오래 함께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을 직시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투사해서 바라본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 즉, 미소 서식지이다. 미생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서식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최소한의 안정된 주거는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멀고도 먼 이야기이다. 아무리 정신승리로 극복해 보려고 해도 현실은 막막하다. 그럼에도 미소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이 사는 방식을 강요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미소는 그저 미소라는 사람이다. 그것을 담담하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 그대로 밀어붙인 이 영화가 그래서 좋았다. 소소리 바람결에 나부끼는 샌 머리는 그녀가 약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테이블 위의 술값만 봐도 위스키 값이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 마련된 미소의 서식지를 보며 안도한다.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그 음식을 달게 먹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히 하고, 그 풍속을 즐긴다고 노자는 말했다. 영화의 소공녀는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안빈낙도의 삶을 보여준다. 한 명이라도 자신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묘하게 위로된다. 선입관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담배를 자유롭게 피우는 미소의 모습, 그녀의 강박 없는 자유로움을 동경한다. 




이솜 배우의 유니크한 분위기는 영화와 썩 잘 어울린다. 특히, 빅 숄더 갈색 코트와 초록색 목도리, 살짝 붙는 나팔 청바지, 손등을 덮는 회색 핸드 워머, 마른 체형을 여러 겹 감싸는 레이어드, 매니쉬 한 스타일, 주황색 트렁크, 대부분의 패션이 장식 없이 색감만으로 빈티지하고 멋스러웠다. 부동산 공인중개사로 나오는 박지영 배우의 생활밀착 연기에 많이 웃었다. 안재홍 배우는 볼수록 희한한 배우다. 다양한 인물을 위화감 없이 체득하여 보여준다. (극 중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날의 사랑 고백과 키스신은 뜬금없었다.) 무엇보다 며느리로 맞이하기 위한 선배 가족의 계략은 단순히 웃을 수만은 없었다. 골드 미스가 아닌 (나이 먹은) 솔로 여자는 결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여전히 사회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면 씁쓸하다. 








덧:


<소공녀>가 무슨 뜻이냐고 하여 나도 모르게 작은 공주라고 말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찾아보니 원제는 <The Little Princess>, 일본에서 <少公女>라고 번역한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 같다. 프랜시스 호저스 버넷의 <소공녀>와 더불어 그녀의 <소공자>와 <비밀의 화원>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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