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개인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 Sep 09. 2018

영화 <체실 비치에서>

#사적인영화27: 기다려줘,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9/20일 개봉 예정) 



영화는 2007년 영국에서 출간된 베스트셀러 <체실 비치에서>를 영화한 작품이다. 이언 매큐언 작가는 이 소설로 맨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며,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책에도 선정됐다. 수년에 걸쳐 제작 물망에 올랐던 영화는 결국 <캐롤>의 제작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칼슨과 스티븐 울리가 프로듀서를 맡으며 본격화됐다. 여기에 <어톤먼트>와 달리 이언 매큐언이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 "단편 소설이나 중편 소설은 각색하기 좋다. 기존의 소설을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부차적 줄거리 없이 주된 플롯이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영화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그는 원작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는데, 소설 쓰던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언제나 소설을 시각적으로 구상하고, 장면 전체가 완성되도록 세부 묘사를 하는 편이다." 영화를 보기 전 미리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플롯의 중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밀도 있는 감정 묘사와 세세한 장면 묘사로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눈 앞의 그림을 보듯 선연한 이 원작의 세계를 과연 영화가 잘 구현해 낼 수 있을까. 



(9)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소설의 도입부처럼 영화의 배경은 보수적인 1960년대, 성관계는 결혼한 부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이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체실 비치의 조지 왕조풍 호텔에 도착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가정환경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악 취향도 다르다. 한편, 플로렌스는 섹스에 대한 미지의 거부감을 숨긴 채 결혼하고 이를 모르는 에드워드는 자신의 의무(?)에만 사로잡혀 있다. 각자 내면의 불안과 모순을 지닌 아직은 서투른 이 신혼부부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삐걱대며 실수를 연발하는데... 아름다운 체실 비치에서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된 두 사람은 상처만 남긴 채 결별을 선택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행복해야 할 신혼부부가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에 결혼하자마자 헤어진다는 것. 드라마틱한 전개나 반전도 없고, 딱히 클라이맥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영화로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 소설적 재미를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 나름 잘 풀어냈다, 마치 소설처럼. 이것이 바로 플롯의 힘일까.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영화는 (소설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시작된다. 호텔에 도착한 남녀의 모습, 룸 서비스 식사를 하고 허둥거리며 침대에 오르기까지의 여백 사이로, 그들의 첫 만남부터 성장 환경, 그들이 지닌 고민과 꿈, 성격 차이와 이상을 플래쉬백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두 사람이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이야기가 오고 가는데, 이 연인의 결별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처럼 보인다. 비록 침대 위에서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엉거주춤 관계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숨죽여 킬킬거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심각해진다. 대다수의 연인이라면 서로 다른 차이로 인한 갈등을 겪고 화해하고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갈 것이다. 서로 알아가며 맞춰가는 과정을 이 신혼부부는 첫날밤 호텔에서 맞닦뜨리고 혼란에 빠진다.   



그들 가정사는 두 사람의 모순적인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품고 있다.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 똘똘 뭉친 자의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꿈, 알 수 없는 미래의 공포. 플로렌스는 에니스머 사중주단의 제 1 바이올린 주자로 위그모어 홀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꿈꾼다. 그리고 중앙의 9C 좌석에 앉을 에드워드를 위해 연주할 것이다. 에드워드는 정신이 아픈 엄마를 대하는 플로렌스의 성숙함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하고, 무엇보다 함께 자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물론 둘은 서로를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것이다. 그에 따른 행복, 안정감, 따뜻함, 편안함.... 사랑이 줄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감정의 결이 따라온다.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는 남녀의 차이만큼이나 개인의 차이도 존재한다. 체실 비치에서 플로렌스는 세상 가장 엉뚱한 제안을 한다. 성적 관계없이도 게이 커플처럼 서로를 보살피며 함께 살아가자고, 그것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간과한 지점은 게이 커플도 섹스는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이에 분개를 넘어선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을 기만한 거짓말쟁이로 그녀를 몰아세우고 불같은 화를 낸다. 


만약, 그가 그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한 번 더 그녀를 붙잡았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단지 처음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거라고, 결혼처럼 섹스도 처음이 있기 마련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인내를 갖고 배려했다면 어땠을까. 사랑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는 배려해야 한다. 누구나 치기 어리고 서투르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실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할 수도 있다. 퍼즐 한 조각으로 그림이 완성될 수도 있고, 미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운명 또한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미스터리이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엔딩이다. 소설은 에드워드의 상상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그려냈다면 영화는 그것을 꽤 구체적인 장면과 설정으로 보여준다. 조금 더 확실하게 이들 사랑에 대한 방점을 찍기에 마지막 장면은 퍽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196-197)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진정성에 필적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녀 곁에 머물렀더라면, 그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집중하며 의욕적으로 살았을지도 모르고 또 젊은 시절 꿈꿨던 그 역사책 시리즈를 집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략)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싶었다. 단춧구멍에 꽂은 민들레, 벨벳 머리끈, 어깨에 둘러멘 캔버스 가방,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골격이 튼튼한 아름다운 얼굴을.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내 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이 영화는 저명한 연극 연출가 도미닉 쿡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치명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 순간,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에 천착한다." 라며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했음을 밝혔다. 


배우 시얼샤 로넌은 바이올리니스트 플로렌스를 맡아,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얼굴 근육만으로도 섬세하게 표현해 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녀가 취하는 몸짓과 자세조차 연기였다. 불안한 눈빛의 호소, 일그러진 입매, 뺨의 떨림, 바이올린을 켜는 손짓과 침대 위에서의 맨발조차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에 감탄했다. 침묵 속에서도 표정을 통해 생각을 흐름을 나타낼 수 있는 배우라고 한 이언 매큐언의 찬사에 공감한다. 빌리 하울은 차세대 유망주로 이름을 올렸다. <덩케르크>의 하사관 역으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출연한 이 배우는 여기서는 순박한 너드의 지적인 매력을 지닌 영국 남자 에드워드를 맡았다. 운명적인 만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역사학도의 순수하면서 서투른 모습을, 체실 비치에서는 플로렌스에게 분노하는 감정의 극과 극을 자연스레 연기했다. 



더불어 영화의 아름다운 배경과 미술은 보는 내내 눈길 사로잡는다. 영화 곳곳의 주된 세계를 색채로 강조하여 표현했는데 가령, 플로렌스의 집은 대칭적 구도의 무채색 계열로, 에드워드의 집은 빈티지스럽고 코티지하게 밝고 따뜻한 색감으로, 호텔은 갈등이 시작되는 장소로써 올드하지만 역사의 전통을 지닌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유독 자주색 침대보가 인상적이었다) 의상 또한 원작 그대로 플로렌스의 터키 블루색의 원피스로 제작됐고, 이는 플로렌스의 불투명한 파란 눈동자와 그리고 푸른 체실 비치와도 잘 어울렸다. 또한 60년대를 대표하는 에드워드의 댄디한 스타일은 지금도 통용되는 패션이다. 영화 OST에 대해서도 말을 안 할 수가 없는데, 클래식과 재즈, 락을 오가는 음악은 주인공의 감정과 심리를 대변하며 경계를 넘나 든다. <레이디 맥베스>의 음악을 맡은 댄 존스 음악감독과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의 협연은 보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도 함께 읽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과연 플로렌스와 에드워드, 어느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지 확인해 보는 즐거움, 사랑과 결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서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