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립된 곳
가장 고립된 곳은 이곳이야,
벗어나기도, 찾아오기도 불가능해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고,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괜찮아지고 , 안 좋아지고를 반복했다.
괜찮아서 퇴원했는데, 외부에서 스트레스를 받으시곤
다시 쓰러지셨다.
쓰러지면 쓰러질수록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세 번의 구급차 안에서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 , 내가 아는 아들 맞니?"
"진짜 장난치지 마 엄마, "
"우리 아들 맞아요?"
"하, 진짜 왜 그래 엄마.. "
잠깐잠깐 기억을 잃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잦은 횟수로 말을 더듬곤 하셨다.
안정되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거라 했지만,
그때 당시 엄마의 모습은 내가 봤던 엄마의 모습 중에서
가장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엄마의 상태는 호전되고 있었다.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엔 못이 박혔다.
"네가 그런 거잖아."
어쩌면 나 자신이 나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아니, 나에게 하고 있었던 말, 해주고 있던 말,
엄마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를 줬던가,
결국 이지경까지 와야 했었을까,
“진짜 나 좀 짜증 나게 하지 마”
하고 엄마를 밀쳐 넘어트린 적이 있었고,
“이럴 거면 날 왜 낳은 거야”
하며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었고,
”그냥 내가 죽으면 되는 거지? “
하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넜던 게 아닐까,
전부다 내 탓입니다.
그 행동이 아빠의 빈자리라고 얘기하기엔
핑계로만 남을게 뻔하니까, 이해 못 하는 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엄마”
“응”
“못난 아들 낳아서 고생만 하네,”
“아니야”
“미안해”
“괜찮아,”
“안 괜찮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포기하고 싶잖아,”
“그랬던 적도 있었지 네가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해서,
싹 다 포기해 버릴까 하고, 마음먹었던 적 분명히 있었지,“
“근데 왜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데,”
“엄마 배 아파 낳은 아들인데, 어떻게 포기하겠어,“
“너무 엄마 마음에 담아 두지 마,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나 잠시만 화장실 좀,”
나는 확실히 주변 아들처럼 잘하기엔 글렀다고 생각한다. 주변 가정은 항상 내 눈에 부러움의 대상이었지,
“수압이 너무 안 좋네 이 병원은,”
내려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대충 때우고 엄마 곁에 있길 반복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밥 먹고 왔어?”
“응”
“뭐 먹었어,”
“짜장면 짬뽕 탕수육,”
“그걸 혼자 다 먹었다고?”
“당연하지”
“대단하네,”
실은 사과하나 먹었어도, 배부른 척했다.
무엇 하나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병원밥 맛없지,”
“싱겁지, 밥도 잘 안 넘어가기도 하고,”
“좀 짜게 해달라고 할까?”
“아니, 괜찮아,”
“밖에서 두유라도 사 올까?”
“두 개만 사줘 그럼”
병원 건물 안 편의점을 가는 길에 흡연구역에 들려
담배 한 대를 태웠다.
“저번에 봤던 학생이네, 어머니 보러 왔어요?”
주변 어르신이 내게 말을 건다.
”학생 아니에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엄마가 아프셔서 , 병문안 왔어요, 그나저나, 코로나가 너무 유행이네요, 어르신도 조심하세요,”
간단한 안부를 묻곤 나는 갈길로 향했다.
편의점에 와서 엄마가 좋아할 만한 간식류를 골랐다, 두유와 땅콩샌드, 마스크도 샀다.
“뭘 이리 많이 사 왔어?”
“돈이 좀 남길래, 다 털었어.”
“돈이 어딨다고 정말..”
“그냥 먹어, 이런 거 좋아하잖아. “
“잘 먹을게, 고마워.”
1주일 후 엄마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퇴원해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오랜만에 같이 걸었다.
“날씨 좋네,”
“그러게, 날씨 너무 좋다.”
“몸은,”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
“무리하지 마.”
“알았다니까,”
지나가며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가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해 보였다.
“한 끼에 누가 10만 원 이상을 태워, 돈 아까워 죽겠네,”
“뭐가?”
“아니야, 아무것도, 엄마 물들어간 고기 안 좋아하니까, 무한리필 집이나 갈래?”
“엄만 아무거나 다 잘 먹어,”
“알았으니까, 갈 거지?”
“응.”
식당에 도착한 엄마와 나는 오랜만에 바깥에서 외식을 하였다.
“줘봐 봐, 나 이 집에서 일해봤어.”
“고작 3일 해놓곤 무슨 (웃으며 말한다)“
“3일 배운 집게 솜씨를 무시하지 마. (덩달아 웃으며)“
제법 잘 구운 고기를 엄마 앞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맛있지?”
“아들이 구워줘서 더 맛있는 것 같다 야 “
“많이 먹어.”
평소였으면 내 밥그릇 위에 고기를 올려주었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 많이 잘해주고 싶고, 이런 고기쯤이야 얼마든지 사주고 싶었다.
“배불러?”
“못 먹겠다. 엄마 너무 배부르다.”
“알았어, 좀 쉬다 가자.”
외식을 끝마친 엄마와 나는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많은 대화를 산책하며 풀어갔다.
“나 독립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래, 한번 알아보자,”
“나 진짜 열심히 살아볼게,”
“엄만 너 믿어,”
“그걸 이제 알게 돼서 미안해,”
엄마와 나는 부동산에 가게 되었다.
제일 싸고 넓기만 한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딱 봐도 벌레와 곰팡이가 있는 원룸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지낼 수밖에,
"일 구해보며 차근차근 살아봐, "
"열심히 살게, "
"이건 이번 주 용돈이야, 엄마도 돈 없으니까 많이 못줘, "
"고마워, 다신 용돈 달라고 안 할게, "
"엄만 너 믿으니까, 잘할 거라 믿어, 뭐든 잡히는 대로 열정을 다해 살아주길 바라, "
"알았어, 고마워, "
엄마가 이곳을 마련해 준 돈은 매달, 혹은 매달이 아닐지라도 꾸준히 돈을 넣어 지원받은 적금으로
계약을 하였다. 정말 있는 돈 없는 돈 다 빼내서 마련해 준 집이다, 초라해 보일지 라도 내겐 이곳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집이 없다.
기존에 내가 모아둔 돈과 엄마가 준 마지막 용돈을 더해 생활용품을 구매하였다.
우리가 집에서 쓰던 휴지와 생필품들이 이렇게 비싼 줄 도 모르고, 막 썼었구나,
나는 이 순간에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이런 것 들을 마음먹지 않고도
구매할 만큼의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최대한 저렴한 걸로, 어떤 게 좋은 건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가격만 싼 걸로 샀다.
저녁엔 컵라면으로 때웠다, 내가 못살더라도, 풍족하게 먹을 만큼 돈도 없기 때문에,
이런 걸로 라도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허숭세월로 보내었다, 지원하는 알바마다 이미 마감이 되어있는 곳이 많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매번 갱신되는 알바 공고를 보는 것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제발, 제발.. "
내 간절함을 알아준 탓인진 몰라도, 전단지 알바가 올라왔다.
나는 바로 전화를 했고, 전단지를 돌릴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사장님은 일을 잘할 것 같다며 나를 신뢰하셨고,
내일부터 나오면 된다고 하셨다.
지점은 이번에 새로 오픈한 피자치킨 가게였었고,
손님들이 관심을 가지고 시킬 수 있게끔 전단지 알바를 구한다고 하셨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할 수 있을 거예요, "
나는 문자로 보내주신 아파트, 장소를 차를 탈 여력이 안되었기 때문에
직접 지도를 켜며 걸어가 부착하였다.
3시간씩 걸어가며 일해도 나에게 주어진 돈은 전단지를 얼마나 많이 붙였는지에 따른
개수에 중요했다.
전단지를 몰래 버리고 다 부착했다고 하는 알바들도 있겠지만, 난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하나하나 남은 수량을 생각하며 의미 있는 생활이 되길 바라왔었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쉽게 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은 쉬운 일들이 아니다.
"이런 거 붙이시면 곤란해요, "
"그냥 가주세요, "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살려면 붙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지금은요.
여러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경비아저씨에게도 혼나가며
몰래 붙여왔다. 내게 중요한 거라곤 전단지와 테이프, 그리고 가방,
어떻게 마주한 알바인데, 당시 코로나 가 유행이던 시절이라
알바깥은 건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될 정도였으니까,
더운 여름, 땀이나도, 냄새가 나더라도,
살려면 , 벌려면, 힘들어야 한다.
나는 이 힘듦도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수고했어요, 최근 주문이 많이 들어오던데 , 전단지 보고 전화했다는 말이 많더라고요, "
"감사합니다."
"잘하시는 것 같아요."
"잘해야 제 마음이 편해서요."
"고생했어요, 이건 덤이에요."
사장님이 덤으로 2만 원을 더 얹어 주셨다.
"감사합니다. 이번 주까지 하면 되는 거죠?"
"네, 남은 이틀도 부탁드릴게요, "
"네, 내일 뵙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뭘 해야 할까, 다른 기회가 있을까,
남은 이틀을 그런 생각으로 보냈던 것 같다.
딱히 올라오는 모집 글도 없는 데다가,
스펙도 없어서 취업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다음 월세는 , 폰 요금은 , 어떡하지..
마지막 날이 되었다.
처음으로 받은 전단지를 모두 부착하고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다 붙이신 거예요?"
"네, 마지막 날이기도 해서요, "
"고생했네요, "
"뭘요, 가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여기 알바로 들어오실래요?"
"네?"
"저희가 직원을 구하는데, 학생처럼 일 잘하는 사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저, 피자 치킨집 알바를 경험해보지 못해서요, "
"괜찮아요,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 잘 따라와 주기만 해 주세요, "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며칠 나올 수 있어요?"
"주 7일 가능합니다. 만나는 사람들 많이 없습니다."
많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날 사람들이 없는 거지만,
"1주일 내내, 하루 5시간씩, 도와주시면 돼요, "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
한 달에 130만 원 , 주휴수당 없이 진행했다.
뭐가 되었든,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피자가게의 일은 단순했다. 홀 식사보다 배달이 훨씬 많이 있기에
나의 할 일은 음식을 만들고, 포장하고, 보내면 끝,
천천히 일을 배우며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피자를 만들 때나,
처음으로 치킨을 튀길 때나,
처음으로 전화를 받을 때나,
그 모든 것들이 처음 경험해 보는 거로만 가득해,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전단지 알바로 받은 돈으로
한 달을 버텼다, 어떻게 버틴 건진 모르겠지만,
15만 원 정도로 한 달을 지낸 셈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이 찾아왔다.
"고생했어요, 다음 달도 잘 부탁해요, "
"감사합니다."
처음 받아보는 월급, 내 통장에 보이는 액수,
그게 남들 눈엔 작은 돈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돈에 내 한 달이 담겨있다.
여러 앱을 활용해서 가장 저렴한 생활을 하려 노력했다.
노 X랜드 제품들은 정말 값싸고 좋은 것들이 많다.
거기서 가장 자주 시킨 건 스파게티였다.
스파게티는 저렴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쉽다.
쉽게 만들고, 먹고 , 그걸로 때우는 거다.
적금으로 50만 원을 넣었고,
통신비와 원룸비, 로 반이상이 나갔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살 수 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25만 원이었고,
이 돈들은 모두 식비로 나갔다.
한 달에 25만 원으로 지낸 셈이다.
그리고 난 다시 일을 하겠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언젠가 벗어날 거란 생각으로,
다시 엄마에게 좋은 아들로 남기 위해,
나는 그다음 달, 그다음 달도 똑같이 지내며
살아내고 있었다.
“이번 주에 만날까??”
“바빠서, 못 만날 거 같은데,”
“넌 뭐 일만 하고 사는 사람 같냐,”
“그게 아니라, 시간은 있는데 너무 피곤해,”
“다음엔 피곤해도 보는 걸로!!”
“다음에, 꼭 그럴게”
너무 피곤해서가 아니야,
너희들이랑 놀고 나면 나는 돈이 없어,
진짜 없어, 그래서 그랬어,
나도 놀고 싶지만, 지금은 못 놀아,
우리 나중에 놀자,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