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내 운명

동시성의 비밀

by 루치올라



인간은 자신의 인식 한계와 이해의 정도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미치는 범위가 좁고

이해의 폭이 한계에 닿아 있다 보니

결국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전혀 원하지 않는 운명의 방향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어쩌면 이 좁은 시야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정보가 넘쳐나고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지만 정작 현대인들은 내면에 깊은 결핍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른바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외부 환경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내면의 숨은 조각들을 가만히 관찰하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짜 불행의 민낯은 조금 다릅니다.

진정한 절망은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마주침이 지독할 정도로 반복해서 일어날 때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은 사람을 또 만나고 겪고 싶지 않은 아픔이 형태만 바꾼 채 다시 내 삶을 덮칠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힌 듯한 깊은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마음이 답답해 견딜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무속인을 찾아가거나 사주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묻습니다.

당장 숨통을 조이는 그 답답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분명 우리의 얕은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외부의 힘에 기대어 내 팔자가 원래 사나워서 그렇다며 체념하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운전대를 타인에게 넘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외부의 점괘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가 외부의 현실과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동시성의 원리입니다.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움이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자신을 제발 알아달라며 현실 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식하지 못한 내면의 아픔은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형태를 바꾸어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나 상황으로 눈앞에 계속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저 거슬리는 소음이나 재수 없는 우연이 아니라 아직 읽지 못한 내 영혼의 간절한 편지인 셈입니다. 이 편지를 뜯어보지 않고 그저 운명을 탓하기만 한다면 원하지 않는 일들은 영원한 굴레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반복되는 사건들을 불운이 아니라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우주가 보내는 초대장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하듯 관찰자의 의식은 현실이라는 결과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하고 억눌렸던 무의식을 따뜻하게 의식의 빛으로 끌어올릴 때 우리의 외부 현실도 새로운 주파수에 맞춰 아름답게 재배열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내 운명은 왜 이럴까 자책하며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가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겪어온 그 모든 원치 않던 시간들은 당신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깊고 강인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려는 삶의 치열한 애정이었습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상처를 보듬어 안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운명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로소 당신만의 고귀한 삶을 주도적으로 빚어가는 아름다운 공동 창조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