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싱크홀, 공허를 재해석하다
엄청난 열정의 열기로 하루를 살아냈다.
넘치던 의욕과 뜨거움이 모두 식어버린,
하루의 끝자락.
편안함보다 공허함이 더 크게 밀려온다.
하루의 첫 시작에서 출발한 뜨거운 열정은 공허함이라는 싸늘한 바람에 금세 차디차게 식어버리고,
싱크홀만 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버린다.
공허함의 시작
바쁘게, 치열하게, 멈출 새 없이 달리는 동안엔 몰랐던 감정이다.
그런데 멈추는 순간, 문득 느껴진다.
‘내가 이토록 애쓰며 살아온 하루에, 왜 마음은 이렇게 비어 있는 걸까.’
공허는 단지 감정이 아니다.
그건 삶의 구조에서 비롯된 내면의 반응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말한다.
기필코 성과를 내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런 생각이 나를 쪼그라들게 하고, 주눅 들게 만든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느샌가 나 역시 다수의 생각에 동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보다 성과와 타인의 기준에 맞춘 삶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설계한다.
그 설계는 언제나 ‘나중에’ 꽃피기를 기다린다.
내 삶의 기쁨은 ‘인내’라는 이름으로 저당 잡히고, 현재는 끊임없이 미뤄진다.
그런데 그 결과가 예상과 달랐을 때, 사람은 깊은 허무를 느낀다.
열심히 한 만큼 채워지지 않고, 참아온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 마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이 바로, 공허라는 감정의 입구이자 공허의 본질이다.
공허함은 자기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나타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멀쩡히 살아 있는 듯 보이면서도 영혼이 텅 빈 듯한 무중력 상태를 겪는다.
공허함은 삶의 방향이 ‘타인 중심’으로 고정되었을 때 발생하는 내면의 경고다.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겉으로만 보이는 나를 안쓰럽게 부축하며 살아간다.
결국엔 나조차도, 내 삶을 다른 누군가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공허함은 단지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허무에 빠진다.”
그 말처럼, 공허함은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들지 않을 때 찾아온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가 느끼고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위해 공허라는 감정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공허함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흔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내려놓고 있는 중일지 도 모른다.
온종일 해야 할 일, 견뎌야 할 말, 참아야 할 감정들로 가득 찼던 마음이 문득 비워졌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공허는 더 이상 ‘무너짐’이 아니다. 그건 비워냄이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여백이다.
비유하자면, 나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을 잘 먹고, 잘 소화시킨 뒤 마지막으로 비워내는 배설의 그 순간처럼. 허무함보다 오히려 개운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가볍게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건강에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혼자 있을 때, 비워진 내 마음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나를 마주한다.
그 시간이 어쩌면, 내가 나 자신과 진심으로 만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칼이 도구가 될 수도, 무기가 될 수도 있듯이 공허함 또한 양면성을 지닌 감정이다.
공허함은 나에게 이로운 감정이다.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회복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잠시의 비워냄이다.
그리고 깨끗하게 텅 빈 나에게, 나는 조용히 말을 건넨다.
“지금,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이니?”
어떤 선택이 너를 더 안정시켜 줄까,
그 질문은 나를 혼돈하게 하지만 그 질문 덕분에 나는 텅 빈 공간을 다시 채우고,
길을 잃지 않고 또다시 힘차게 내 삶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시인)
“어떤 것도 당신의 고요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서 삶이 태어난다.”
릴케는 내면과의 침묵 속에서 삶의 의미가 자라난다고 보았고,
공허 역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라 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