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유독, 자기 고통만은 가장 크고, 가장 특별하게 느껴진다.
심리학은 이를 고통의 중심성 편향이라 부른다.
자신의 고통은 내면 깊숙이 울리기에 더욱 선명하고 무겁지만,
타인의 일들은 겉으로만 보여 쉽게 지나친다.
나는 나를 속속들이 보지만,
타인의 내면은 알 수 없기에 나만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은 자주 이렇게 믿는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거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
여기서 중요한 건 ‘왜’보다 ‘나만’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괴로울 때, 거기에 외로움이 더해지면, 슬픔은 더욱 깊어지고,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된다.
반대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괴로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외로움은 줄어든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가 함께 아프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기도 한다.
남의 불행을 보며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선별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며,
삶은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무게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의 고통 또한 덜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기 결핍의 감옥에 가둔다.
어떤 이는 물질을, 어떤 이는 사랑을,
어떤 이는 의미를 잃고 살아간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우울과 자살률이 더 높은 건 우연이 아니다.
더 많이 가졌다는 사실이, 반드시 더 깊은 위안을 주진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단순히 '없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나는 더 나은걸 못 가진 사람이다”라는
자기 인식 자체가 비교와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삶 전체를 고통으로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 왜곡은, 타인의 고통을 가려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고통만을 유일한 것처럼 부풀린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순간 다른 이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 단 하나의 자각에서부터 비로소 고통의 외곽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경전 속 겨자씨 이야기]
이야기는, 그 깨달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꺾고 다시 일으켰는지를 보여준다.
한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키사 고타미.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슬픔에 잠겼다.
작은 시신을 품은 채, 그녀는 사람들을 찾아가 울부짖는다.
“제 아이를 살릴 약이 어디 없나요…?”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고, 어떤 이는 그녀를 미쳤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붓다에게 데려간다.
붓다는 조용히 말한다.
“좋다.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약이 있다.
단, 지금껏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한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 오너라.”
그녀는 절박한 마음으로 마을을 돌았다.
하지만 모든 집마다 누군가는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자식을, 친구를 잃은 사연이 있었다.
모두가 다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남의 집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렇게 울고 있었다.
다만, 소리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멈췄다.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품고 있던 아이를 껴안고, 길가에 주저앉아 울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을 위해 울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를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지의 응결체”라 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슬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진짜 고통은 고통 자체보다, ‘나만 아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 생각이 인간을 가장 외롭게, 가장 무력하게 만든다.
붓다는 겨자씨 이야기를 통해 말없이 알려준다.
“슬픔은 내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인간의 보편적인 짐이다.
세상 모든 고통을 혼자 다 짊어진 게 아니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아직 다른 집들의 대문을 두드려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도, 수많은 사연과 눈물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겨자씨는 결국 아기를 살리는 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리는 씨앗이었다.
힘듬은 누구에게든,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쯤 찾아올 수 있다.
그 차이는 다만,
시차와 고통의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이 깨달음은 나를 향한 차가운 판단이 아니라,
내가 내게 베푸는 자비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