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사는 법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by 최길성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누구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은 공동체 문화가 오랜 전통이다. 개인보다는'우리'를 유독 강조하는 사회다. 젊은 시절 내 삶이 그랬다. 나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지내는 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인정과 의리를 위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며 살았다. 친구와 동창, 동료, 가족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인맥을 보물단지처럼 생각했다. 한마디로 남을 의식하는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 나였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소외와 상실감을 느낀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보다 더 괴로운 일도 없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한 삶이 되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때 나 자신이 겪는 고립에 의한 고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공동체 삶이란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의 고통의 근원인 것이다. 혼자만의 기분 전환이나 한순간의 노력만으로 고통을 해소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타인들과 관계는 거부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때문에 내 삶은 사회적 조건에 구속되어 살 수밖에 없다. 결국 내 인생이란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연인이나 부부간에 갈등이나 충돌 없이는 살지 못한다. 싸우지 말자고 약속해 놓고 사는 부부는 가면을 쓴 채 살자는 것과 같다. 싸우지 않기 위해 말하고 싶어도 참게 되고 서로가 하고 싶은 일도 참게 된다.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서있는 식물처럼 사는 격이다. 풍파는 일지 않지만 서로의 정과 사랑이 사라진 삶이 되고 만다. 서로에게서 느껴야 할 인정 욕구를 위해 거짓말이 시작되고 비밀이 생기게 된다. 싸우고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감자 껍질을 씻을 때처럼 서로 박박 문지르고 비벼대야 감자가 깨끗해질 수 있는 법이다. 가면을 벗겨내 뽀얀 감자처럼 될 때까지 철저히 다투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모든 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주 많이 부딪치고 많이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가족 간에 단절이 생기는 것도 다툼이 부족한데 원인이 있다. 싸움이 부족해 서로의 이해하지 못하고 피한 결과가 단절이다. 부모는 자식의 행동에 불만이 있어도 말없이 지켜보고, 자식은 고지식한 부모와 싸워봤자 소용없다고 포기해 버린다. 서로가 싸움을 피하다 보니 소통이 없어지고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진 존재끼리 인정 욕구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툼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가 위하는 사이일수록 더 싸워야 한다. 서로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는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다. 활기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다.


회사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싸워야 강한 조직이 된다. 겉으로 일사불란한 조직은 속으로 와해되어 있는 죽어있는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고요하고 평온한 조직은 성장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없는 조직이다. 독재 권력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조직은 무사안일에 빠지고 긴장감도 사라진다. 조직이 와해되어 거짓 연대의식에 의존할 뿐이다. 자유 민주 사회처럼 잘해보려는 갈등과 충돌로 생동감이 넘쳐야 언젠가 건강하고 강력한 사회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끼리 고통과 좌절을 겪고 사는 게 삶이다. 그럴 때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짜증 나"를 연발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어"라고 한탄하거나, 권위 내지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거나 관철시키는 사람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 구조적 조건을 바꾸려는 사람도 있다. 정치가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전적으로 나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욕구는 상대의 욕구와 연관되어 있다. 싸운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인해 욕구를 수정해야 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욕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욕구끼리 부딪친 것을 말한다. 갈등과 충돌은 자신의 욕구가 상대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반대로 자신도 상대의 욕구를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갈등과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나의 욕구와 내가 지닌 욕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것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관계의 실패나 실망은 상대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으로 인한 상처나 불안은 그 사람을 집착한데 시작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가득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 내려놓아도 인간관계는 한결 편해지고 수월해진다. 나이가 늘면서 장연스럽게 깨달은 바가 그러하다. 전화번호부 지인 목록이 하나 둘 줄어들면서 복잡하던 삶이 단순해지고 홀가분해진다. 점점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면서 욕구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집착하다 보니 주인공으로서 삶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남에게 비난받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상대에 끌려다니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고 좋아하는 기준에 맞춰 살다 보니 갈등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사는 것보다 능동적이고 자발적 존재로 사는 사람이 나 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흔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서로가 불안한 인격체로서 서로의 비난에 흔들려 좌충우돌하는 삶이 결코 잘 사는 삶이라 할 순 없다. 상대방을 배려한답시고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자신에게 미련한 삶도 없다. 자신에게 불성실한 삶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부질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지인이 있다고 지나치게 개의할 필요가 없다. 자신과 가치관이 맞지 않는 사람으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서로 다른 차이로 생긴 결과로 인정하거나 상대방 사정이라고 돌리면 해소된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방향과 자신의 욕구대로 사는 것이다. 대인관계 속에서 나 답게 사는 지혜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거리를 둘 줄 아는 생활 태도가 잘 사는 비결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매력적인 삶이다. 친구든 가족이든 똑같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관계가 건강한 관계다. 허물없이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 선을 넘는 언행을 하는 친구는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다. 친하다는 핑계로 욕설을 친근감으로 착각하는 친구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다. 불편하고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고교 동창생들과 헤어진 사유이기도 하다.


친구가 싫으면서 질질 끌려다니면서 지내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난 인연이라도 차라리 정리하는 편이 낫다. 한 번 맺은 인연을 단절하기는 쉽지 않지만 피하고 지내는 편이 훨씬 낫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우정을 나누던 친구와 헤어진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그런 친구일수록 정 떨어짐도 더 크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깨끗이 잊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남이 결코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일은 없다. 대신 아파하거나 갈등을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신경 쓰며 사는 삶처럼 부질없고 무의미한 삶은 없다. 삶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자신의 삶을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정도 나눌 줄 알고 협조할 줄도 알기 마련이다. 자립심이 강해 마음이 차분하고 안정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존중하여 거리감을 둘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집착하면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탓에 허무한 마음만 남게 된다. 젊은 시절 아내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인생은 가족밖에 없다.'는 말이다. 친구가 좋아 한창 바깥 생활을 하던 내게 일침을 가할 때마다 했던 말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족에게 잘하려는 쓴소리였다. 들을 땐 몹시 듣기 싫었다. 한편으로 고마운 말이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잘 사는 사람은 하나같이 가족에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젊어서 술친구나 둘도 없다는 친구가 있어도 정작 아프고 힘들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가족 밖엔 없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하여 병원 응급실에 갔는 데 담당 의사가 생명이 위독하니 가까운 아주대병원으로 후송하라는 것이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응급차에 실려 40분 동안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급체였다. 병원에 함께 있던 6~7명 친구들이 있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남아 있던 사람은 결국 아내와 딸뿐이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 입장이었다면 그리 행동을 하지 않았을 일이다.


지난한 법정 싸움을 벌이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을 기준을 잡고 나 다운 삶을 지켜 낼 수 존재는 나뿐이다. 또한 진심 어린 마음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내 있는 그대로 모습을 믿고 지지해준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동료나 친구도 그럴 순 없는 일이다. 내 마음처럼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에게도 나를 자신의 일로 생각해주길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외와 고난을 이겨내며 외로운 시간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 안의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타인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나다움을 알아내야 나다운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하루하루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사는 것이 나 답게 사는 길이다.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사는 법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미루고 살았던 지난날 미숙한 삶을 돌아보면 아쉽다. 생계를 핑계로 워라벨이 무너진 삶이 안타깝다. 가족과 자신의 행복한 삶을 등한시하고 이기적 성공과 출세만을 쫓아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황혼 이혼이 늘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 노년의 삶이 많은 원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족은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도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다가 삶이 저물어 꺼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깨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에 쓸쓸함이 밀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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