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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거 Aug 25. 2024

'백일의 기적'에 대한 고찰

 나에게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6살 때 집 앞 골목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서 나의 12년 뒤를 상상했던 기억이다.  그 12년 뒤 모습은 책상 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꾀나 큰 사람의 모습이었다(굳이 12년 뒤를 생각한 이유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아마 12 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18살이 되었을 때, 12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했고, 나는 다시 30살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봤었다. 직장을 다니는 어른이겠지? 란 단순한 생각을 했고, 그렇게 30살이 되었다. 30살에는 42살을 생각하며, '아후 일단 오기는 하겠지? 너무 아저씨겠다'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 그 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미래를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산다'가 아니라, 그냥 '미래를 생각한다'정도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글에서도 느끼겠지만, 특별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기가 오겠지? 정도의 생각을 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그냥 '그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취업준비를 할 때 수 없이 낙방을 할 때, '그래도 올해 말쯤이면 일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논문 때문에 한참 고통받던 어느 해 4월, 아내와 집 주변 벚꽃길을 걸으며 '내년에는 학위를 받고 이 벚꽃을 보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상했던 순간이 오면 '지금이 순간'을 상상했던 그때 떠올린다.

 이 상상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비현실적인(누군가는 쓸데없다고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로또가 당첨되면 뭐를 할까?'  라던지, '어 이 블로그가 갑자기 이슈가 돼서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등등 말이다.

 내 생각에 나에게 이 습관은 꾀나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첫째로, 상상했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어찌 보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상상하지만) 내 삶에 만족감을 느끼고, 둘째로 긍정적인 것들을(비현실적일 경우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버릇이 생겼으며, 이것들이 합쳐지며 결과적으로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존감(?)이 꾀나 높아지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길 바라며 이 습관의 핵심을 요약하면 '긍정적인 상상만 하고, 그 상상 중 이루어진 것에만 집중한다'이지, 절대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하며 준비하자'가 아님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본론으로 와서 숲이가 태어나고 산후조리원에서 '백일의 기적'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실제 내 자녀가 생기기 전에는 마냥 상식으로 '백일 전까지 아이들은 3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기에 부모가 잠이 모자라다'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이 기가이 굉장히 고통스럽기에 '백일을 버티면 아이가 어느 순간 밤에 통잠을 잔다'라는 식으로'기적'이란 표현을 쓰는 것 같았다.


 굳이 이 '백일의 기적'이란 타이틀로 글을 쓰는 이유는 사소할 수 있지만, 이 사소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이 굉장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일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부모들이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 똑같은 노력을 하고도 노력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에 따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달라지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백일의 기적은 아이에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즉, 백일의 기간 동안 '아이가 변화'한다기보다는 '부모가 적응'한다고 받아들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숲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목욕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욕조 등 장비 등에 조언을 구하고 있는데 한 분께서 이런 답변을 주셨다.

 '물론 장비가 좋지만, 첫째 때는 온갖 장비 다 사용해서 30분 걸렸는데, 둘째 때는 샤워기 하나로 3분 컷이었습니다, ' 수많은 장비 추천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는 말이었다.


 나는 육아를 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했다. 

똥 싼 엉덩이를 능숙하게 씻기는 나를 상상하고, 목욕을 즐겁게 시키는 모습을 상상한다. 능수능란하게 분유를 제조하고 먹이는 모습을 상상하고, 아이를 편안하게 재우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초반에 정말 어려웠던 저 모든 것들이 글을 쓰는 이 시점(숲이탄생 62일)에서 크게 어려움 없이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물론 아이도 백일의 기간 동안 변화하고 성장하는 게 맞다. 하지만 분명 '백일의 기적'이 일어나는 데에는 '부모의 적응'이 단연코 크다는 걸 주장하고 싶다. 만약 '아이의 변화'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혹여나 백일뒤에 아이가 통장을 자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는 왜 이러지?'라는 굉장히 슬픈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적응'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아이를 양육하는데 익숙해지고 있기에 혹여나 아이의 통잠이 조금 늦어져도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기적'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앞의 글들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상세히 따지면 관련이 있기는 하다! 하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이번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백일의 기적에 대해 '아이의 변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부모의 적응'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기간 동안 '자녀를 대했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아이에게 해가 될만한 요소들은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으려 했고, 아이의 모든 행동과 표현에 집중했던 우리의 모습을, 

 그런데 고작 백일이 지났을 때 우리의 모습이 그때와 같은가? 벌써 많은 변화들이 있을 거다.

 이 변화들이 부모인 내가 잘 적응을 해서 그리고 익숙해져서 나타는 긍정적 변화인지, 아니면 이제 아이가 충분히 자랐다는 생각에 소중함을 잊고 귀찮음을 느끼는 건 아닌지 꼭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뭐가 옳고 그른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가 있다. 지금의 그 생각이 앞으로 아이를 양육하는데 계속 함께 할 것이고, 아이와 나와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아이의 내적성장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그래서 나는 분명하게 전자의 길을 따르려 노력할 것임을.


 나는 언젠가 숲이가 자라서, 우리 세 가족이 카레에 밥을 말아먹는 그 순간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분명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숲이와 소중한 시간들을 보낼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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