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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거 Aug 24. 2024

아이는 봐주는 게 아니라 (돌)봐주는 것이었다.

한참 영어공부를 새롭게 하던 시절, 영단어를 단순히 해석본으로 외워서는 안 되며, 단어를 보면 그 현상이 떠올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예시가, See와 Watch였다.  둘 다 '보다'라고 단순히 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꾀나 차이가 있음을 See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Watch는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것, 즉 감상하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대뜸 영어단어 이야기를 한 것은 내 일상에서 육아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보다 아이(숲이)를 잘 보는 것 같았다. 산후조리원에서부터 꾀나 섬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집에 와서도 아이의 욕구를 꾀나 잘 파악하면서 크게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40일 정도가 될 때까지는 정말 잘 지냈다. 산후조리가 필요한 아내를 최대한 쉬게 하고, 24시간 육아를 거의 전담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내가 육아를 엄청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기본적으로 순했고, 아이의 욕구를 잘 파악하고 들어주려는 내 노력과, 아이가 울어도 그거를 견딜 수 있는 무던한 내 성격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40일이 지나면서부터, 아이가 칭얼대는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배고플 때, '잠투정 부릴 때' ,  '트림을 하고 싶을 때' 아이고 칭얼댄다는 것도 파악했고, 대략적으로 상황에 따른 칭얼거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칭얼거림이 갈수록 늘어났고, 유독 '나 혼자' 아이를 돌볼 때 아이의 칭얼거림이 심허 것 같았다.

 그 시기, 손님이 올 때마다 아이가 울지 않고 잘 놀아서, 와이프와 나는 되게 단순히 '애가 이쁨 받으려고 사람들한테 이쁜 짓 하네'라고 생각을 했다.

 저번주 주말 간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정말 '천사가 여기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숲이는 이틀을 잘 보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여지없이 숲이는 찡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득 진중하게 생각했다.

 '왜 손님이 있을 때만 아이가 울지 않지?'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손님들 은 숲이를 끊임없이 이뻐해 주며 놀아주는구나'


 여기서 상담사라는 직업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장점이, 이 시기 아이의 양육에 치명적 단점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내 입으로 말하기 뭐 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솔직히 나는 스피치 능력이 뛰어나거나 그렇지 않다. 내가 말을 잘하게 보이는 이유는 온전히 '상대방이 원하는 이야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상담사라는 직업적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고, 상대방의 '비언어적 표현' 그리고 '무의식 중 내비치는 욕구'등을 파악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의 눈에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내 능력은 신생아인 숲이를 돌볼 때까지 아주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말을 못 하는 아이의 표현을 답답해하지 않았으며, 나의 행위에 대한 숲이의 반응들을 세세하게 살피며 숲이의 욕구도 충족할 수 있었다. 단, 아주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바로 '숲이에게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의식주'라는 '본능적인 욕구'만 잘 채워준 것이다. 그리고 그 본능적인 욕구를 잘 채워주기 위해 나는 숲이를 아주 정성스럽게 '관찰'만 했었다.


 내가 아동학자는 아니기에 그리고 의사도 아니기에 숲이의 상황을 정확히 진단할 수 없지만, 숲이가 신생아시기가 지나고 영아시기가 될수록 많은 감각들이 살아나면서 '심심'하다는 감정을 느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숲이의 그 '심심'이란 욕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왔을 때 숲이가 울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손님들은 숲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뻐해 주고 놀아준다. 그리고 숲이가 배가 고프거나 졸릴 때는 우리 부부가 그 욕구를 충족해 준다. 즉, 숲이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 부부만 있을 때는,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해 준 뒤 나머지 시간은 우리 부부도 '쉼'을 택했다. 즉, 숲이는 놀고 싶어서 칭얼대는데, 우리 부부는 그 시간 숲이가 쉬어주길 바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도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깐.


 이 단순한 이유를 깨달은 순간부터. 숲이를 많이 놀아준다. 잘 놀아주니, 오히려 잘 자고, 잘 자니 또 잘 먹는다. 이 사이클이 반복되다 보니, 이전에 아이를 놀아주지 않고 재우려 노력했을 때보다 부모인 우리가 가지는 심신의 여유가 훨씬 커졌다.


 아이를 '돌봐'줘야 하는데, 나는 순간 내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단순히 아이를 '보기만'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대체 왜 칭얼거리지?'라며 아이에 대한 의구심만 키웠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해야 하고, 그 시기가 언어표현이 어려운 시기라면 더욱더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게 가장 중요하고 이것을 지킬 것임을 다짐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좋지만, 주변인의 조언(잔소리는 아님) 역시 잘 받아들여야 함'도 다짐한다.


 이 똑같은 다짐을, 블로그에 또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두서없는 오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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