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이유

<여름 다차> 이반 쿠가츠

by 플랫화잍

눈을 감으면 이다음 해 여름의 풍경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래에 할 일을 계획하다 보면 그 여름은 이미 다 지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란 그 여름을 추억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박지연 소설집중, 문학동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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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태풍처럼 몰아쳤던 강의 일정을 마감했다. 그 와중에 읽기도 나름대로, 쓰기도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본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 이제 계절은 낙엽이 몽땅 떨어지고 차가운 바람 몰아치는 겨울이다. 12월 초, 북극 한파를 제대로 느끼려면 한참 멀었지만, 대면으로 강의하느라 이곳저곳 땀 흘리며 강의처를 누볐다. 다시 여름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간 현장에서 쌓은 경험 사이의 공백이 메꿔짐을 느낀다. 얼마만큼의 수확,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책과 글이 있는 자리에는 늘 좋은 사람이 있었다는 기대감에 한 발짝 더 내디딜 뿐이다.


‘여름’이라는 단어는 해를 의미하는 한자 ’日’과 ‘열매‘라는 순우리말에서 비롯했다. 해가 쨍해서 식물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계절이라는 의미다. 완연한 초록으로 채워지는 계절. 초록은 나무가 갖고 있는 제 빛깔 중 가장 나무스러운 색이다. 가지 사이 가득 채워진 ‘초록’은 제 빛을 발하고 열매 맺기 위한 채움의 과정이지 계획된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 여름‘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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