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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Apr 15. 2023

슬픔을 공부하는 이유

자기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지난주까지 날이 무척 더웠다. 자기를 봐달라는 듯 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다. 길어서 몸을 폭 덮는 느낌이 좋은 바바리를 딱 한번 입고 다시 옷장에 넣었다. 서랍장에는 스웨터와 반팔 티셔츠가 이리저리 뒤섞여 산을 이루었다. “4월 초입인데 이래도 되나”를 무수히 반복했다.


뒤엉킨 계절감각을 일깨우듯 카카오스토리는 몇 해 전 그날의 기억을 알려 주었다. 스산했던 그날 아침, 큰 아이 둘을 등원버스에 태워보내며 엄마들과 “언제 따뜻해질까요?”를 인사말처럼 반복했다. 육아휴직 중이던 동생집에서 아기와 친정 엄마랑 함께 텔레비전 속 비현실 같은 현실을 멍하니 지켜봤다. 지금이라면 절대 수긍하지 않았을 ‘전원구조’라는 큼지막한 자막에 안도했다.


독서활동가를 준비하던 2015년, 동네 도서관의 백화현 선생님 강의에서 세월호 학생들 이야기로 모두가 목이 메어 수업 진행이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 교사생활을 이어가던 친구들이 이유 모를 두통과 무력감을 호소했는데 한참 지나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실로 “고통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비된 고통이 불러올 고통이 끔찍한 것”(정희진처럼 읽기, p.48)이었다. 떠나보내지 못한 고통은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당시 세월호는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노란 바람개비였다. 한겨울 휑한 광장은 노란 리본을 만들러 작은 공간을 꽉 메웠던 사람들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던 공간이었다. 현재 세월호 기억공간은 서울시 의회 옆에 임시로 자리하는데 그마저도 철거위기를 맞았고, 이에 저항하는 1인 시위가 이어지는 중이다.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가고 있어요. 취업을 하지도 못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사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지도 못했고, 여전히 우울증 약을 먹고 있거든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리지만 분명히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어요. 제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요.”(p.150)


2014년으로부터 9년이 무심히 흘러갔다. 올해 4월, 유가영의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다른, 2023)가 ’세월호 생존학생이 되어 쓰는 다짐‘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되었다. 그는 다른 생존학생들과 비영리 단체 운디드 힐러(상처 입은 치유자)를 만들어 트라우마에 취약한 아동과 갑작스러운 재난재해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한다. 책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기까지의 이야기다.


23년 3월 CGV용산에서는 영화 <장기자랑> 시사회가 열렸다. 세월호 엄마들이 극단을 만들어 수학여행에서 아이들이 하려던 장기자랑을 무대에서 펼쳐낸다는 다큐멘터리다.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듯 책상을 정리하고 벽에 걸린 교복을 매만지며 눈물짓던 엄마들이 연극 연습에 돌입하기만 하면 서로 질투하고 중심배역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며 다투었다. 당연한 일상을 다루듯 연극 속 아이들도 제주에 ‘무사히’ 도착한다. 슬퍼하느라 그리고 슬퍼야 했으므로 미뤄두었던 그네 인생의 다단한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슬픔 앞에서는 모두가 패배한다. 하지만 두 작품을 앞에 두고 더는 ‘피해자다움’을 논하지 말아 달라. 서툰 연기를 무대에서 펼치고 꽃다발 너머 환히 웃는 엄마들과 친구와 나란히 손잡고 찍은 책장 말미 저자 유가영은 당당하고 행복해 보이니까.


나는 이 기록이 감동서사나 살아낸 이가 죽은 이의 바람을 등에 지고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캄캄한 바다에서 이들을 끌어낸 것은 살기 위한 주체의 발버둥이며 각자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민 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책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를 읽고 영화 <장기자랑>을 보면 좋겠다. 사람은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빛깔로, 자신만의 의미로 삶을 살아”(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유가영)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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