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랫화잍 May 21. 2023

그리움이 모락모락(毛落毛樂)

언젠가 사무치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길쭉하게 자라난 세 아이의 손톱과 덥수룩한 머리칼은 마치 게으른 엄마를 상징하는 듯해서 늘 깔끔하게 다듬어주려 애썼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밥풀 같은 손발톱 60개를 잘라내고 나면 정작 내 손톱 자를 기력이 없었다.


성장 속도에 비례하여 아이들의 머리숱도 나날이 풍성해졌다. 문구점에서 구입한 숱가위로 앞머리만 잘라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영락없는 맥가이버 스타일이 되었다. 큰아이 둘에게 사탕을 쥐어주고, 셋째를 임신한 빵빵한 배로 센터에서 일자 미용 커트와 앞머리 자르기를 배웠다. 선생님께 부탁해서 전문가용 커트 가위도 구입했다. 앞으로 매번 미용실에서 셋을 다 자르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조금은 아끼겠지 라는 심산이었다.


내 어린 시절에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는 아이는 드물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날이면 영화 <집으로>의 한 장면처럼 마당 한가운데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를 놓고, 동생들과 보자기를 둘러쓰고 나란히 앉곤 했다. 영화 속 상우가 조는 사이 그의 앞머리가 할머니의 큼지막한 가위로 쑹덩쑹덩 잘려 나갔다. 대학생이 되어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참 다행이었네’하며 피식 웃었다. 긴 머리나 단발은 양쪽 길이만 잘 맞으면 그럭저럭 무난했으니까.


큰애와 둘째의 귀 주변머리와 뒤통수를 다듬던 첫날, 영화 속 장면과 나의 어린 시절이 보자기를 뒤집어쓴 아이들 위에 고스란히 오버랩되었다. 어느새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들의 머리칼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이에게 “머리 다듬어드려?”라고 물으면 그들은 “엄마, 장난치지 마세요.”라 대번에 응수한다. 엄마가 어릴 때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줘서 유치원에서 부끄러웠다나. 좋다고 박수칠 땐 언제고, 좀 억울했다.


막내딸은 아직 스스럼없이 머리를 맡긴다. 처음 머리칼을 자르던 날 행여나 아플까 봐 눈을 질끈 감던 아기가 내 앉은키를 훌쩍 넘어섰다. 어깨를 감쌌던 보자기를 풀고 거울 앞에 달려가 이리저리 잘린 모양새를 살피더니 예쁘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서야 얼굴이 환해졌다. 오랜만에 미용가위를 꺼내어 날을 닦으며 딸아이가 보자기 뒤집어쓰고 머리를 맡길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해 본다. 지루한 듯 엉덩이를 움찔대는 모습도, 손가락은 움직여도 되냐 묻는 목소리도, 시간이 지날수록 삐뚜름해지는 고개도,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풍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동의 실체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