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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Jun 12. 2023

함께 딛는 바닥

늘 있었다. 단지 몰랐을 뿐.

그와 나는 팔짱을 끼는 사이다. 십 대 소녀도 아니고 마흔 중반을 훌쩍 넘겨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게 될 줄 몰랐다. 나는 그를 ‘팔짱메이트’라 부른다. 팔짱 메이트보다 한 발짝 앞에 서서 내 오른팔을 쓱 내밀면 그는 내 팔에 자기 손을 수줍게 걸어준다.


이십 대의 그는 재잘재잘 참 말이 많다. 그와 팔짱을 끼고 걸으면 내 말수가 자연스레 줄어든다. 그의 말에 대꾸도 해줘야 하고, 앞서가는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지 않을까, 마주 걸어오는 이가 갑자기 방향전환을 해서 어깨를 부딪히는 건 아닐까 신경이 곤두선다. 그와 팔짱을 끼고부터 무심히 딛고 걷는 땅바닥이 결코 평평하지 않고 여러 층위의 단차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다. 그와 함께 건물과 건물 사이, 학교와 지하철역을 이동하며 같은 장애를 가진 인플루언서의 sns에서 재미있는 부분, 궁금한 지점이 생기면 적어두었다가 묻곤 했다. 보이는 사람의 세상만큼 그들의 세상도 다단했다. 편할 때가 의외로 많다는 그의 말에 학교 앞 큰길에서 깔깔대며 함께 웃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땅을 박차고 펄쩍 뛰어오르는 호기로움이 있었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이와 외출을 하면서부터였다. 온통 계단으로 쌓아 올려진 세상을 새삼 마주했다. 경사로를 찾으려면 멀리 빙 돌아야 했다. 곧고, 평탄하고, 편리하면서, 쾌적한 곳을 누리려면 아기띠로 아기를 내 몸에 묶거나, 유아차를 함께 들어 옮겨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도움을 청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외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현재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떤 경사로는 계단을 오르고서야 진입할 수 있고, 연석으로 가로막힌 산책로는 여전히 울퉁불퉁하여 바퀴가 빠지기 일쑤다.


팔짱 메이트 덕분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 점자블록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형 무늬 보도블록은 방향을 표시한다. 길이 끝나는 곳은 점형 블록으로 마무리하여 잠시 멈춰갈 것을 알린다. 팔짱 메이트의 팔을 낀 채, 한 눈을 팔 때면 바닥에 툭 튀어나온 철판이, 인도와 도로를 구분하는 연석의 모서리가 그의 발을 걸기 일쑤였다. 점자블록에 올라서면 그는 발바닥으로 점과 선을 감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점자 블록이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가에서 점자블록 위에 무심히 부려둔 커다란 짐박스, 널브러진 킥보드는 팔짱메이트가 빙 돌아가야 하는 장애물이 된다.


정작 우리는 사회 내 이동권 확보 측면에서 무엇 하나 기여한 바가 없다. 그나마 확보된 경사로나 줄을 길게 늘어서곤 하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계단을 오르다 누군가의 머리가 깨지고, 선로에 몸을 묶어가며 온몸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저상 버스 뒤쪽 널찍한 진입로는 통근버스를 막아서고, 시민의 무사출근을 담보 삼았다는 죄명을 감수하며 전장연이 투쟁한 대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한 해 전장연은 숱하게 지하철을 타고 내리며 ”너희가 사람이냐. “라는 원성을 들었다. 오래된 모욕과 배제의 언사야말로 전장연이 1년 넘게 이동권 투쟁을 이어올 수 있었던 동력일 게다.


한 사람만 감내하면 모두가 불편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계산법은 그 수명을 다했다. 이는 누군가의 고통이나 공익을 빌미로 언제든 타인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대익 교수는 <공감의 반경>에서 공감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을 만들어내라고 말한다. 즉, 접촉과 교류를 통해 공감의 폭을 넓혀나가라는 의미다. 팔짱 메이트와 팔을 끼고 걸었던 한 학기의 수확이라면, 우리가 서로 잘 감각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 아닐까. 팔짱 끼고 어둑한 교육관을 나서며 다음 학기에 무슨 수업을 수강할지 상의했다. 여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서로의 모자란 감각을 보태어 더 또렷하게 바닥을 디딜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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